▲ 김종 시인(화가)

‘화첩일기’ 20에 썼던 「장가계를 다녀와서」를 읽은 두 분의 독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장가계의 서체적 독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가계의 지리지형적 관광에서 나는 이곳 산천이 보여준 서체적 암시를 강하게 받았다. 뭐 이름부터가 어필봉이라 불리는 기둥모양의 다섯 봉우리를 보면서 저리 힘차고 개성에 넘치는 필획을 이곳 장가계라는 이국의 관광지에서 보게 되다니 그때의 아찔한 감동을 어찌 필설로 헤아리겠는가. 장가계를 보고 한국에 와서 주변의 몇몇 시인, 서예가에게 얘기했더니 의외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래서 장가계의 서체에 대한 메모를 말하려 한다.

장가계를 보고 온 사람들은 산세의 형상적 파격성에 감탄한다. 3억 6천만 년 전 장가계는 푸른 파도가 굽이치는 망망대해였다. 지구의 지각변동으로 해저가 육지로 솟았고 웅대하면서도 기이한 산세가 만들어졌다. 이들 산세에 안개비라도 젖어 내리면 산수화 속의 신비경이 한눈에 펼쳐졌다. 이쯤 되니 장가계를 일러 「도화원기」의 무릉도원이라 찬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시금 장가계를 바라보라. ‘신비경의 산수화’나 ‘무릉도원’ 따위의 표현이 얼마나 고식적인 관찰인가를! 장가계는 생김새만으로도 예술 그 자체인데 필획이나 서체적 형상으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과 기이함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지금까지 서예는 임서적 훈련만 제 一義로 삼았다. 허나 서예가 진정 예술의 품목에 가담하려면 그간의 규범이나 법식에서 벗어나 서예만의 변화와 개성과 기질에 나아가야 한다. 장가계는 그런 의미에서 내 자신이 찾아가는 산수체로의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산과 물은 어느 곳이든 서체적 필획을 이루며 뻗어가고 흘러갔었다. 여기에다 저들 산봉우리의 뭉침과 번짐 또한 서체의 변화를 끌어내는 두 가지의 원리가 되었다.

여기서 뻗어간다는 말은 기립했거나 돌출한 것들의 형상적 지향을 말하며 흘러간다는 것은 엎드리거나 누운 것들이 길 찾아가는 현상적 유동성이다. 필획에서 뭉침은 강고한 힘을 만들어내고 번짐은 유연하면서도 순발력 있는 표정을 만든다. 서예는 한마디로 박제된 예술이 아닌, 생신하면서도 능동적인 뻗침과 흐름과 뭉침과 번짐의 원리로 제작하는 예술이어야 한다.

산과 물과 바위와 안개가 나름의 개성을 보여주는 지상적 자연물임은 설명이 불요하다. 나는 지금 골몰하고 있기로, 인류예술사에 명멸한 명필들의 개성위에 산수체(山水?)라는 서체 하나를 추가한다. 인간의 가슴속에 참 예술의 감동을 혼미한 찬탄으로 몰아갈 서예의 산천지가 산수체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서예인들은 예술에서 서예가 왜 자꾸 회의적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 것은 죽는다. 갑각류가 단단해 보여도 허물을 벗지 못하면 사멸하듯 서예 또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이겨내야 한다. 장가계를 비롯한 산수의 형상을 다시금 보라. 그들의 부분품들이 얼마나 면밀한 미감의 덩어리인가를! 나는 서예의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 산수체를 제안하며 서예인들의 동참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