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나의 시작은 한 마리의 미세한 정충이었다. 정충은 끝없는 본능의 힘을 따라 용기백배하게 헤엄쳐 가다가 덜컥 생명체로 당첨되어 오늘의 ‘나’로 태어났다. 내 입장에서 대단한 행운이다. 여기까지 지나온 내 생의 굽이굽이를 짚어보자니 내 더듬이가 많이 모자랄 만큼 아스라하다. 살얼음판 아닌 게 없었고 속눈썹마저 간들간들 바동거리기 십상이었다.

겉으론 짐짓 무사태평의 세월을 지내왔건만 발싸심 나게 오금이 저리고 겁부터 난다. 내려다보면 입 벌린 악어가 고개 쳐든 시퍼런 격랑의 바다와 올려다보면 야수들 득시글거리는 절벽의 중간쯤에 밧줄 하나 내려져 있고 그 밧줄에 힘겹게 매달려 있는 나, 그런데 이게 뭐람. 사각사각 들리는 소리 있어 고개 드니 난데없는 흰 쥐 검은 쥐가 번갈아 밧줄을 갉아댄다.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없다. 두 마리 쥐의 이빨자국을 견디던 밧줄마저 점점 가늘어지고 종당에는 ‘뚝’ 하고 끊길 턴데. 그 결과는 바다로 떨어지든 하늘에 오르든 아찔하기만 하다. 이 우화를 초등학교 때 배우고 나는 세상살이의 불안함을 많이도 느끼며 여기까지 성장했다.

나는 온몸을 떨면서 문풍지로 울기도 했다. 아니 그 울음 속을 유영하는 젖은 빨래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세상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당연한 듯 존재한다. 그런데도 지나온 시간 시간은 그 모두가 아슬아슬하다. 산에 사는 호랑이만 무섭고 몸에 자란 암 덩어리만 두렵고 겁나는 게 아니다. 세상은 고요할수록 그 다음을 더 맘 졸이며 지켜보게 했다. 마치나 폭풍전야에 부풀어 오른 완벽한 정적처럼. ‘아슬아슬’, 맨 앞서서 한발 먼저 가다보면 길바닥에서 돈다발도 줍게 하고, 성수대교 무너지는 소리를 듣게도 하지만 실로 덤터기쓰고 그 아슬아슬을 매달고 다닌 딱하고 측은한 원죄의 세월은 어쩌랴.

일전, 대로상에서 중앙선에 갇혀 질주하는 차량의 행렬을 좌우로 경험한 일이 있었다. 나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모두 이 같았다 생각하니 새삼 전율이 일었다. 내 무사한 것은 하루해를 넘긴 저녁시간에 이만하기 얼마나 다행이냐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 나를 겁나게 겁주는 순간순간의 아슬아슬이여 내 곁을 조용히 눈감고 지나가거라. 신의 가호는 항시 먼데 있는 게 아니지. 아니, 아슬아슬과 손잡고 동행하는 도반이지. 행운과 불운의 그 오금 저리는 간극에서 이 짓 저 짓 하며 달려온 내 인생도 웬만큼은 무사함에 안착했다는 생각이다. 하기야 내 생명이 시작되던 그 때부터 내 세월의 횃대에도 아름다운 갖가지 신비가 칠색무지개처럼 걸쳐있었다.

아슬아슬이여, 밥풀떼기처럼 떼어내거나 밀쳐버리면 그만일 나를 여기까지 붙여둔 실로 인자한 아슬아슬이여, 새길수록 그대는 시퍼렇다.

나는 아슬아슬을 대부분 잊고 살았다. 공기 없는 잠시잠깐도 못 살겠지만 그 유무마저 망각한 ‘아슬아슬’ 또한 까맣게 잊었다. 식은 땀 흘리는 악몽의 시간에도 아슬아슬은 생면부지다. 몰라서 그렇지, 빠져나온 아슬아슬이 살얼음판 썰매 타기와 뭐가 다를까. 물에 빠지기 전 그 자리를 빠져나온 우리는 무감각한 안전을 계속 꿈꾼다. 잊고 사니까 여기까지 왔고 무사태평하니까 꿈꾸고 산다.

아슬아슬이여, 너의 망각으로 원시 위에 집짓는 나는 맘 편한 밥 먹으며 욕심껏 잠자고 꿈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