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물길 흐르듯 시간은 간다. 예나 지금이나 그 시간이란 흐름이 사람살이의 영고성쇠를 만들어 왔다. 문제는 빠르기. 뒷짐 지고 팔자걸음 걷자는 건 아니지만 세상의 빠르기 전쟁은 이미 사람의 상상을 넘었다. 이른바 ‘디지털’로 상징되는 시간의 속도 전쟁에 너나없이 자기적 실종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누가 있어 이를 막고 보호해 줄 것인가.
 
어느 시간 분석가의 성찰이 새삼 실감된다. 고려, 조선조를 합한 천년이 다음엔 얼마 만에 오는가 했더니 50년으로, 그 오십년은 다시 육 개월, 이 육 개월은 하루, 하루는 분·초로 들어가더라는 것. 지난 시대 천년의 크기가 지금은 분 ·초로 반짝거리고 있다. 이, 분·초마저 언제 더욱 미세한 단위로 쪼개질지 모른다. 아니 이미 쪼개지고 있다. 이쯤 되니 어찌 땅에다 손 짚고 정신 차릴 여유나 있겠는가.

시간이 빠르다는 것. 그 속도감을 잘도 견디는 요즘 사람들이 제 정신으로 사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현기증이 난다든가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는 말로는 감이 오지 않는다. 어제까지는 그리 대단한 것도 오늘은 휴지. 멈칫거리거나 더디 가면 어디쯤에서 사라질지 그마저 알 수 없다. 빠르기에 피 튀기는 경쟁을 하다 보니 휩쓸리지 않는 것만도 하늘에 대고 감사기도를 올려야 할 판이다.

이쯤 되고 보니 세간에는 사람의 온기는 식고 말소리만 커졌다. 그래도 지난 시간에는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보내고 사람의 도리와 관계를 하늘처럼 여겼었다. 담 넘어 떡 접시를 돌리고 길에서 만난 사람에겐 손잡고 안부부터 물었다. 그게 지상의 인간들이 보여준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관심이었다.‘내려다보면 불빛이 보이는 거리’와 ‘그릇 속의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를 그리움이 번져가는 인간적인 간격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작금엔 그게 없다. 사람을 둘러친 울타리가 사라진, 허허벌판의 연속인 것이다.

이제 인간들은 저마다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혈혈단신이다. 부부는 갈라서고 가족은 흩어진다. 제 한 몸 건사하며 되돌아 볼 시간이 없으니 어찌 주변을 살피며 상대를 향한 배려가 생기겠는가. 상아탑에서‘인문학의 위기’를 제 아무리 외쳐본들 그것은 공염불이고 푸념단지일 뿐이다. 디지털이 인문학의 황폐화에 맹독성 바이러스를 대량 살포한 것이다. 컴퓨터 앞에 주저앉아 내 자신만을 투입하다보니 도대체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끈끈한 접착력을 상실한 것이다. 시간이야 어디론가 흘러가겠지만 우리는 그 흐름에 뒤집히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노 젓는 것만도 가히 기적이겠다.

학생들뿐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이 지금껏 습득한 지식에는 확신이 없다. 이 쏟아지는 지식은 어찌 소화하며 소화한들 언제 휴지처럼 내버려질 것인가. 세상에 태어난 그것들이 버텨줄 유효기간마저 장담할 수 없고 눈 번히 뜨고 쓸려나갈 것을 날밤 새워 학습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질없다. 그렇다고 손놓고 먼 산보는 장승이 될 수는 없잖은가.

아인슈타인은 인간은 가까운 미래에 빛보다 다섯 배쯤 빠른 비행기를 제작할 것이라 했다. 그 비행기를 타고 우주공간을 날면 과거에 떠나간 5배 쯤의 시간을 따라잡을 수 있는 셈이다. 우주공간을 100년쯤 날아가면 500년 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허나 이 대과학자의 예견대로 빛보다 5배 빠른 비행기에 올라 탄다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빠른 만큼 사람은 낡아버리게 된다. ‘아날로그’에는 느려도 사람의 음색과 체온이 있었다. 속도만 피해가면 더 많은 인간세상이 본래대로 복원될 텐데 그 길을 놔두고 속도에만 중독된 인간들이‘디지털’의 처마나 기웃거린다.

따뜻한 체온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너와 내가 한솥밥 되어 만나는 길, 느린 강물 같은 아날로그로 살아가는 일이다. 진정 늙지 않고 사는 길은 달리 방법이 없겠다. 허나 더디 늙어가며 이 지상을 내 의지대로 누릴 수는 있지 않는가. 낡아버리는 일은 버려지는 것, 버려진 뒤엔 뭐가 남으랴. 버려지되 썩지 않는 세상은 더더욱 무섭다. 천천히 낡아서 재빨리 사라지는 세상이 진정 아름답다. 너와 내가 부부가 되고 가족이 되고 한솥밥처럼 익어 꽃으로 피어날 일을 어찌 궁구하며 찾아가랴.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