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업은 아이 3년 찾는다.’ 건망증이 만든 말이다. 건망증이란 놈은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점령해버린 것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 뇌리에 스며들어 갖가지 빛깔로 조화를 부린다. 건망증에게 걸려들기만 하면 누구든 떡 주무르듯 딴사람으로 바꿔 버린다. 오죽하면 등에 업은 아이를 3년 찾는다 고 했을까?

묘법연화경 속에
내 까마득 그 뜻을 잊어먹은 글자가 하나
무교동 왕대포집으로 가서
팁을 오백원씩이나 주어도
도무지 도무지 생각이 안 나는 글자가 하나
나리는 이슬비에
자라는 보리밭에
기왕이면 비 열 끗짜리 속의 쟁끼나 한 마리
그냥 여기 그려두고
낮잠이나 들까나

미당의 시 <낮잠>이다.

묘법연화경 속의 까마득히 잊어먹은 글자를 찾아가듯 문학을 하는 이들은 적당히 자유로울 수 있는 건망증이 밉지만 아름답다.

나폴레옹이 싸움터에까지 휴대하고 가서 일곱 번이나 읽었다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가 열네 차례나 소녀들에게 연정을 고백한 끝에 완성시켰다고 한다. 사실 이 위대한 문학천재에게 지나간 사랑을 그때마다 잊어버리게 한 아름다운 건망증이 없었다면 과연 그 이후의 명작들을 쓸 수 있었을까.

물리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다 ‘기다림’의 깊이와 두께를 부여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다. 가끔씩 두고 온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유실물계’ 앞을 서성거리는 우리네 삶이 우리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것이다.

누구나 강을 건너면 과거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레테의 강이 있다. 망각이 인간세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상징의 한 품목임을 가르친 신화적 표현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건망증에 중독된 천재였다. 쥐고 있는 펜을 찾느라 주머니고 방바닥이고 뒤고 메질 않나 금방까지 나오던 주인공 이름도 까먹어 되짚어 확인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하루는 도스토예프스키가 부인과 나들이를 했다. 마침 마작판 앞을 지나다가 부인에게 웃옷을 맡기고는 잠깐만 다녀오겠다고 들어간 뒤 감감 무소식이었다. 마작판 앞에서 부인과의 약속을 까먹은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뉴저지주의 고급연구기관으로 이사를 한 후 어느 날 프린스턴 대학원장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젠하트 원장님을 바꿔주세요.”

비서가 안 계신다고 말하자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럼, 아인슈타인 박사가 어디에 사는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비서는 아인슈타인 박사님은 사생활에 침해받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노라고 했다. 그러자 전화기의 목소리가 거의 속삭이듯이 작아졌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내가 아인슈타인이다. 집에 가는 중인데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렸구나.”

겨울날 실험에 몰두하던 뉴톤은 조교에게 버럭 화를 냈다. “빨리 이 난로 저리로 치우지 못해! 뜨거워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조교는 “선생님이 조금 떨어지시면 되는데요.” “아차, 이 실수라니!”

 건망증에 관한 한 섹스피어도, 릴케도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의 경우도 뒤질세라 김동인, 김유정, 이상 등이 건망증에서 천재들이었다. 필자 또한 천재(?)인지라 그냥 못 넘길 건망증의 에피소드가 수두룩하다. 금방까지 기억했던 사람의 이름 때문에 입속의 침이 마르기를 수십 번(?). 어느 시비 제막식에서 작품 해설하기로 한 메모지를 챙겨 논 채로 두고 와서 고스란히 순서를 넘겨야하는 쓰라림도 있었고, 결혼 주례를 위해 목욕재계를 하고 여분의 시간에 깜빡 졸다가 ‘아차’ 하고 달려갔을 때는 다른 대타 주례로 결혼식이 끝나 있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의 괴로운 기억으로 신음소리를 흘릴 때가 있다.

그 웬수놈의 건망증은 이제는 아예 내 체질이 될 만큼 좋은 사이로 어울리고 있다. 건망증 앞에서 잊어먹지 않겠다고 긴장하면 할수록 건망증은 나를 더더욱 감쪽같은 발걸이로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그래, 건망증! 이제는 좋든 궂든 삭히고 달래 가면서 살아야할 내 생의 천석고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