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현대인에게 고향을 묻는 건 실례다. 아니, 어느 작가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이제 고향은 천국가기보다 힘든, 실체 없는 신기루로나 아른거리고 있다. 살아온 세월 덕인지 때론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게 고향이다. 허나 손을 내밀어 잡으려면 뒷걸음치며 이내 멀어지는 것이 또한 고향이다.

‘그간의 세월에 고향 버리고 잘들 살더니 지금 와서 무슨 고향 타령이냐’고,  ‘짐 싸들고 떠날 때는 언제고 고향이라고 너만 기다고 있을 줄 알았더냐’고, ‘고향은 너만 떠났을 뿐, 지금도 산 꿩이 알을 낳고 뻐꾸기 시진한 대낮을 울어서 지키고 있다’는 식이다.
 
눈으로만 보면 고향은 현대인에겐 잊혀진, 생각나지만 그냥 무망하게 누워있는 폐허보다 을씨년스런 빈터이다. 그리워 찾아가건만 튕겨 나오듯 뒤돌아  서고, 살아보겠다고 작정했다가도 곧장 사치의 감정으로 되돌리고 만다. 어느 누구, 어머니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고향 또한 마찬가지다.

도시에서 정년을 하고 노년기를 고향에서 지낼 요량으로 고향 行을 시도한 사람들이 많지만, 여러 여건상 돌아가면 편안하겠다는 생각은 일순 바뀌고 만다. 그래서 시골행이기는 하되 맘 맞는 몇이 모여 고향과는 다른 곳에 거처를 정하고 문패를 다는 일을 종종 본다.
 
세대에 따라 고향은 다르다. 5,60대와 3,40대가 다르다. 10대 20대에 오면 고향은 너 나 없이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으로 바뀐다. 우스갯소리로 삼았지만 세태를 반영하는 한 모습 같아서 씁쓸하다. 인간들이 자식 낳고 살아가는 한, 지상에는 산부인과병동이라도 고향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고향도 나름 나름이어서 산마루에 해가 기울 때 울연한 마음이 일지 않고서야 어찌 고향이라 할 수 있으리오. 도회지 아스팔트 위에서 수돗물이나 마시고 자란 사람은 확실히 고향부재의 미아라 할 수 있다.

그런 터에 산부인과 병동의 인큐베이터를 고향이라니. 되새김하여 아련한 추억을 뽑아 올리면 대목 대목에 목이 메이듯 그 무엇인가가 솟아나야 한다. 손때 묻은 갈피갈피의 시간들을 넘기다보면 가슴에 비쳐드는 간절한 그 무엇! 그게 고향이 아니겠는가.

철 늦은 사람이 한 마디 고백을 하자면, 얼마 전 고향에 가서 손잡아 준 정겨운 분들과의 자리에서 “나도 이제 고향 돌아올 나이가 되어”라는 표현을 쓰면서 순간 울먹한 느낌을 받았다. 내 자신이 회고적이라는 생각은 안 하고 살았는데 천석고황이 전류처럼 스쳐간 것이다.

나는 이제 고향을 ‘조강지처’라 이름 붙여두고 내 머리맡의 ‘자리끼’처럼 목마르면 손 내밀어 마시려 한다. 되도록이면 자주. 그러다 보면 고향도 나에게 친구하자고 다가오리라. 고향이 더 이상 사랑노래의 소재는 못 되지만 흰 구름에 실려 가는 망연자실은 되겠지. 밤길 달려 내려온 자식걱정에 등불 잡고 기다리는 어머니 같은 기다림으로 숨 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