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이 책은 사회과학서이자 역사서이며 문학 비평서이며, 특히 고전적 의미에서 하나의 문학(文學)이다. 저자는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그리고 둘러싼 세상을 무대로 파악하며, 시대와 대결한 근현대 한국인이라는 인식들을 관철하여 거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망국과 국권상실, 그리고 전쟁의 참화로 점철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대의 수많은 한국인(조선인)은 생존에 몰두해야 하는 시대, 자신이 사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조차 알기 어려운 시기를 살았고, 후대의 우리로 하여금 그 시대를 음미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자료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후대의 우리 또한 혼돈의 시대를 거치며 전통과 단절되었고, 그 시대를 이해할 관점을 상실해버렸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우리를 잘 알고 있다는 그러한 막연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책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나온 소설들을 텍스트 삼아 한국인의 정체성을 해부한다. 저자는 1999년 ‘오월의 사회과학’을 발표해 ‘5?18광주민중항쟁’을 학술 언어로 정립한 정치학자다. 그는 1906년 작품인 이인직의 ‘혈의 누’에서 1940년 신문연재를 마친 홍명희의 ‘임꺽정’에 이르는 소설 30편에 등장하는 인물을 분석해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나는 과연 어떻게 형성됐을까? 《한국인의 탄생》은 이같이 지극히 원론적인 의문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소재는 바로 근대소설. 저자가 한국인의 존재를 찾기 위해 굳이 문학 자료를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근현대 역사에는 이론적, 철학적으로 당대 사회 문제를 체계적이며, 논리적으로 정리한 저술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풍부하게 남아 잇는 것이 문학이며, 그중에서도 소설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한국 근대 사상사를 이해하기 위해 근대문학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 전면적인 재해석과 재평가를 함으로써 근현대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 구축을 시도한다. 이인직, 이해조, 이광수, 신채호, 김동인, 이상 등 문학가이자 사상가였던 그들이 신소설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또 어떤 인물을 창조했는지 면밀하게 살펴본다. 저자는 근대소설에 담긴 현실‘한국인의 탄생’이 허구 혹은 날조가 아닌 철저하게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보여준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1910년 조선이 망한 후 100년 세월이 흘러 오늘에서야 현대 한국을 주재로 삼은 한국 정치의 ‘문학’이 탄생하였음을 직감한다. 정치학자 최정운의 이 책은 한국 정치학이 드디어 한국인의 삶을 논하기 시작했다는 자립의 선언서로 다가온다. 인류학자 기어츠가 지적한 바, “인류학자는 촌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촌락에서 연구한다.”라는 말을 빌리자면 최정운의 《한국인의 탄생》은 ‘한국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연구한 거의 최초의 작업이다. 한국이 피사체가 아니라 주제가 된 정치학계의 보고서가 이 책이라 하겠다.

문제는 근대 한국 땅에는 정치학적 문건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망해가던 구한말의 황망한 시절은 황망한 대로, 또 식민지 때에는 정치적 주권이 없었던 탓에 정치에 대한 생각을 담은 공식적 문건 자체가 부재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이라고 정치적 열망이야 없을 리가 없다. 최정운은 우회한다. 아니 소설의 특성인 근대적 성격에서 도리어 정치적 사유를 발견한다. 한국근대 소설 문학을 통해 정치학의 ‘주체’를 찾는 데 이 책의 특징이 있고, 또 그 분석력과 설득력에 이 책의 사활이 걸려 있다.

이 책은 복합적인 구도를 가진 학술서이다. 소설을 텍스트로 한 점에서는 문학사요, 정체성을 좇았다는 면에서는 사상사, 작품 분석에서 보이는 구체성으로는 문화사이기도 하다.

이 노작에는 새로운 시각, 날카로운 분석, 반짝이는 지식의 편린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지적(知的)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논리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더라고 충분히 재미있을 터이다.

《한국인의 탄생》은 근대 이전 조선 후기에 나타난 ‘홍길동전’과 ’춘향전‘부터 시작해 20세기 초반 최초의 근대소설 ‘혈의 누’ ‘임꺽정’ ‘무정’ 등을 논한다. 저자는 한국인이 엄청나게 먼 길을 걸어왔고 계속해서 자기 진화를 이뤄왔음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결론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