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인가? 의무인가?
함부로 용서를 이야기하지 마라!

“그들을 꼭 용서해야 하는 건가요.” 이 책은 살인 범죄로 10대 아들을 잃은 어느 여인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과연 용서란 걸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 피해자라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저자는 용서의 본뜻과 실천과정, 용서가 삶에 끼치는 영향을 심리적, 윤리적, 종교적 차원에서 두루 살핀다. 2차 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의 고문 피해자, 강도 살인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잃은 실화를 통해 용서라는 주제를 탐색했다.

이 책의 저자인 영국 성공회 체리 신부는 어느 날 살인사건으로 10대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를 성당에서 만나 위로했다. “그들을 꼭 용서해야 하느냐”고 흐느끼는 어머니에게 체리 신부는 “용서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외에 달리 해줄 말이 없어 당혹감을 느꼈다고 한다. 명색이 용서를 주제로 심리학박사 학위까지 받은 ‘용서 전문가‘였는데도 말이다.

체리 신부는 그 어머니와 만남을 통해 차가운 현실 앞에서 수년간 용서에 관해 깊이 연구한 모든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버리는 걸 경험했다. 이후 그는 용서가 현실이 된 사람들의 ‘경험’과 막연히 글로 용서에 대한 ‘이론’ 사이의 괴리를 메우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삶이 송두리째 파괴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용서를 할 수 있을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일을 당한 피해자들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사람은 피해자의 치유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용서 자체가 당장 불가능한데도 용서해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느껴 심리적 압박을 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피해자가 나라면?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깊은 고민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에 의하면 용서는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내적 갈등과 분노를 감안할 때 결코 종결되지 않는 고통이다. 때문에 용서자 신드롬에 빠져 피해자에게 쉽게 용서를 압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저자는 이웃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 세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고 이른다. 공감과 경청이란 황금, 정신적 길잡이로서의 몰약, 피해자가 신이 아닌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유향. 이 자질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고통에 힘겨워하는 내 이웃의 다정한 길 안내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수시로 맞닥뜨리는 자잘한 배신과 상처에서부터 끔찍한 범죄 피해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심리, 윤리, 종교적 차원에서 두루 살피면서 용서의 본뜻과 실천과정, 그것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다르며, ‘신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용서 부추기기’의 폐해는 무엇인지 등을 밀도 있게 다루고 있다.

또한 상처의 치유라는 문제를 두고 골몰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올바른 길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 책은 용서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거부하면서 용서를 강요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용서가 그만큼 어렵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궁극적 결론은 역시 ‘용서’로 모아진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르러 “용서는 곧 고통이다 그것도 긴 시간이 걸리는 고통이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서라는 말이 가장 불가능한 단어가 돼버린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용서”라는 것이다. 어렵고 지난한 용서의 행위야말로 “상처에 대한 분노, 복수, 비통, 원한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더 나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페테 쉐퍼의 연극 ‘고곤의 선물’‘에 등장하는 주인공 헬렌의 대사를 끌어온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이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야죠. 그 속의 창자까지 같이 딸려 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저자의 비유에 따르자면, 용서란 바로 옆구리에 박힌 창을 뽑는 일이다. 그래서 저자는 “(용서)란 새로운 나로 나아가는 것,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논지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