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양심으로 맞섰던 리영희 선생을 다시 만나다!

《희망》은 다시 읽어도 번득이는 리영희 사상의 정수와 빼어난 문장력과 문학성을 담지한 대표적인 명편들을 ‘산문선’이라는 이름 아래 2006년 발간된 〈리영희 저작집〉(전12권)에서 가려 뽑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희망》은 야만의 시대를 양심으로 맞섰던 참 지식인 리영희 선생의 사상가로서 뿐 아니라 문학가로서의 풍모가 잘 드러난 산문집이다..

이 책을 엮은 임헌영은 책 서두 ‘리영희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며’에서 “이 산문선에서는 정세 분석으로 널리 알려진 사회과학적인 논문보다는 오히려 그런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도록 연동해낸 사상적인 바탕을 다룬 인문학적인 글들을 엄선했다. 민족 분단의 비극, 통일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독재체제와 민주주의 투쟁 등등의 사화과학적인 담론과 함께 주시해야 할 주제는 인간 존재론, 역사, 평화, 신앙, 자연, 예술 등 지역과 세대를 초월한 삶의 슬기를 다룬 글일 것이다.” (중략) “이 산문선에서는 리영희 선생의 사상적인 면모와 문학적·예술적인 재기를 읽을 수 있는 명편들을 중삼으로 골라 뽑았다. 이 글들은 지난 한 시대 증언으로서의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시대든 유효하며, 특히 한국만이 아닌 남북한이나 해외 동포는 룰론 자유와 평등과 행복을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세계시민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전체 6장으로 꾸며진 이 책은 제1장과 5장이 개인적인 체험과 내면적인 정신적 이력서를 다룬 글이라면, 2∼4장은 민족과 세계와 역사, 인간과 사회, 문화예술과 신앙과 교육 등등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풀리지 않을 갈등과 모순 대립의 쟁점을 다룬 글들이다. 마지막 6장은 아무런 자료도 없는 면벽의 감옥에서, 기소의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썼던 ‘상고이유서’다.

《희망》에는 지식인이기에 앞서 한 여자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던, 그리고 감방 생활의 고통과 추위 앞에 몸서리쳤던 한 사내의 고뇌가 담겨 있다. 이 산문선에서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것은 깔끔했던 성격의 선생이 겪어야 했던 옥살이의 괴로움이다. ‘서대문 형무소의 기억’이라는 글에서 그는 일제 때 형무소 사동 복도에도 있던 스팀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뜯겨 나간 것을 보고 “나는 이게 누구의 정부인가, 차라리 일제보다도 못한 정권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곳곳에서 더러운 대나무 젓가락으로 콩밥을 먹고 여름엔 구더기, 겨울엔 동상과 벗 삼아 한해를 나야 했던 인간적인 괴로움에 대해 쓴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의 사상이 책속에 머물러 있는 추상적인 지적 허영이 아니라 현실과 부딪히고 상처 입는 과정을 거쳐 단련된 한 지성의 불굴의 의지의 산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리영희 선생은 글쓰기의 사표(師表)로 늘 존경하고 좋아했던 노신(魯迅)을 글 곳곳에서 빈번히 인용하고 있다. 특히 노신의 『눌한』 「자서」에 나오는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을 곧 우상에 사로잡힌 극한상황에 견주기도 했다. 견고하고 밀폐된 방 안에서 죽음을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괴로운 일일 수도 있지만, 리영희는 지식인으로서 벽에 작은 구멍이라도 뚫어 밝은 빛과 공기를 넣어주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상은 파괴되고, 사회는 진보하며, 희망은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노신의 문학관과 일치하는 대목이며, 리영희 산문선의 제목을 ‘희망’이라고 지은 이유다.

책은 2005년 리영희 교수의 자서전 성격을 갖는 대담집 「대화」의 속편으로 기획됐다고 한다. 임헌영은 책을 펴낸 이유로 “민족사적인 당면과제를 풀어내는 데 탁월한 분석력을 보여줬던 (리 선생의 사상의) 밑바탕에는 풍요로운 인문학적인 소양과 인간중심주의 사상이 깔려 있었음을 강조해야 할 절박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썼다.

리영희 선생이 20세기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고단한 82세의 삶을 내려놓은 지도 벌써 석 달째 접어든다. 선생은 가셨지만, 고단한 현대사의 사슬을 끊는 프로메테우스의 우상을 파괴하는 지혜와 슬기, 한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선생의 말과 글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