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용식 수필가

아내와 산책하러 집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면 도로 오른쪽에 초등학교가 있고 건너편에는 중학교 건설 예정 부지인 공터가 있다. 학교 울타리에는 화려했던 5월의 장미가 벌써 힘이 소진되었는지 색이 바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가장 청정한 시기에 핀다는 장미꽃.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가 뭇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 오만함까지 느꼈었는데 저 풀죽은 모습이라니.

장미꽃이 색이 바래가며 힘을 떨구자 대신 유월의 공터 여러 잡풀 속에서 키 큰 개망초의 하얀 꽃 무리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공원 산자락에도 개망초 꽃밭이 기다란 밭처럼 이어진다. 허리가 가늘어 가벼운 바람에도 크게 출렁인다. 아버지 모시 잠방이 단추만 한 꽃은, 작지만 단정하고 앙증맞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라고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개망초꽃이 그렇다. 하얀 꽃잎이 가운데 노란 꽃술을 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계란을 부쳐놓은 것 같아 왜 계란꽃으로 불리는지도 알 것 같다.

유월을 개망초의 달이라 부르면 어떨까. 봄과 여름을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꽃.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다 보니 꽃도 피는 둥 마는 둥 소리 없이 피는 것 같다. 전국 산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고 잡초가 우거진 공터나 길가, 냇가나 밭둑 같은 곳이면 어김없이 피어있다. 무리 지어 군락을 이루는 광경을 보면 순수하고 담백한 맛이 있어 참 아름답다. 어둠 속 달빛을 받은 꽃은 교교하면서 처연하기까지 하다. 두드러지지 않고 잡초들 속에서 소리소문없이 꽃을 피워내는 개망초는 소시민의 삶, 민초(民草)들을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런데 이 소박하고 순수한 꽃 이름 앞에 왜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는 ‘개’라는 접두어가 붙여졌을까.

개망초가 들어 왔을 때가 일제 침략기였고 밭농사를 방해하는 새로운 잡초여서 나라가 망했다는 경멸의 뜻으로 붙여 개망초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개망초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일제 강점기 시절 철도 건설에 필요한 침목을 미국에서 수입해 올 때 묻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철도가 놓인 곳을 따라 하얀 꽃이 핀 것을 보고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일부러 이 꽃씨를 뿌렸다 하여 망국초라 불렀단다. 이후 다시 개망초로 부르게 되었다는데 어느 이야기가 진실이냐를 떠나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이 땅에 들어와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해 억울할 만도 하겠다.

개망초 꽃말은 ‘화해’라고 한다. 참 절묘하다.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외면이 억울하고 서운할 법도 하겠지만 묵묵히 견디며 자신의 영역을 지켜온 개망초가 누구에게 손을 내미는 것일까. 멀어져 간 사람을 가까이 오게 하고 가까이 있지만 등지고 사는 사람을 다시 되돌려 세우는 마법 같은 ‘화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한 자에게 먼저 내미는 손이다.

시인들의 시선은 역시 일반인과 다른가 보다. 소외되거나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보듬을 줄 안다. 그래서인지 많은 시인이 세상과 화해나 개망초와의 화해를 위한 시를 썼다. 그중 이주형의 ‘개망초 사전’의 몇 구절을 본다.

‘불쑥 내민 꽃은 꽃이 아니라 / 차라리 첫 마음이었습니다 // 그 첫 마음에 어쩌지 못하는 /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차라리 꽃이었습니다. // 꽃을 피우는 건 햇살보다 / 마음이라는 걸 알게 하신 당신, / 거리마다 활짝 핀 건 / 개망초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입니다 // (下略)

산책을 마치고 다시 개망초 꽃밭을 지나는데 아내가 한마디 한다.

“몇 송이 꺾어 화병에 꽂아 두려고 했는데 줄기가 질겨 잘 안 꺾어져.”아내의 한마디가 애매하다. 꺾어 달라는 것인지, 그냥 그렇다는 것인지. 한 번 꺾어볼 요량으로 가볍게 줄기를 잡고 툭 잡아챘다. 어라? 꺾이지는 않고 잡아챘던 새끼손가락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걸 본 아내가 “맞지?”한다. 순간 스치는 생각, ’개‘자를 붙여가며 홀대받고 있지만 나름 자존감은 가지고 있구나. 이 땅의 민초들이 버티며 살아가는 이유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