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천중기 부천에 설립 사장 취임
1952년 상록은 전후 복구에 한창인 조국을 떠나 4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동안 대통령이나 정부 관리들 간의 인연, 사선을 넘나드는 6.25의 체험을 겪은 탓인지 상록에게는 그 기간이 마치 몇 십 년이나 된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1950년대 초반을 맞이한 일본 역시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엿보였다. 일본을 떠나던 1949년 경만 해도 장래를 낙담하기 어렵던 일본의 경제가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이처럼 일어서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정책적 배려도 있었다. 소련이 가세한 한국 전쟁이 터지자 미국으로서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를 공산화로부터 막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설정했다.
이러한 호조건 속에서 1950년대에 이르자 ‘이천’은 여러 자회사를 거느린 소규모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소규모 기업군의 계열사 중 하나가 바로 1963년에 설립한 ‘이천 산업’이다. 아직 일본과의 국교조차 수립되지 않았던 시절에 그가 세운
이천 산업은 한국의 대일 무역 통로로서 나름대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이미 상식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을 한일 회담 이전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어, 1964년만 해도 일본에 대한 한국의
수입의존도는 27퍼센트를 넘은 상태였다. 대일무역 중단 조처가 철회된 1960년 이래 한.일간의 무역 증대를 위한 단체도 속속 생겨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엔 경제를 무기로 한국에 침투하던 일본 회사와 이천 산업의 활동은 명백히 서로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독점자본 진출에
비해 그는 기간산업 발전을 위한 생산재 수출과 기술 원조를 통해 한국의 경제 부흥에 일보하려 애쓴 그 목적부터가 판이했다는 점이다.
여러 기업을 운영하는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일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당시 동경 여러 주간지에 인물기사로 자주
실렸다.
그 기사의 제목은 대개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맨주먹으로 일본을 찾아온 한국 소년, 드디어 재벌이 되다.”
회장이자 노동자로
1973년 서상록은 경기도 부천에 ‘이천 중기 주식회사’를 설립, 사장으로 취임했다.
1960년대 이래 일본에서의 중공업 분야의 재기를 지켜본 끝에, 아무래도 나라가 발전하자면 소비재 산업보다는 기간산업이 뒤를 받쳐주어야 그
중간에 놓이는 공업 분야도 제대로 뻗어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973년 경이면 그 때 비로소 우리 정부가 중화학 공업 분에 눈을 돌리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차관 경제’다 무엇이다로 어렵게나마
국민들의 소비재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오던 정부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기업인들에게 기계 공업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던 터였다.
한편 이 무렵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해온 5개년 계획인 제3기로 들어서서 성공리에 진행되던 시점이기도 했다.
이천 중기 공장은 3천여 평의 대지에 3백여 평의 공장 건물을 짓고, 5톤짜리 주조 5대를 갖춰 준공했다.
내부 설비를 갖추는 과정에서는 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했지만 그 역시 이천 체강에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시가 1억 5천만 원 상당의 기계도 2,3천만 원에 매입할 수 있었다. 그 덕에 공장의 내부 설비까지를
갖추었다.
이천 중기에서는 일반 기계 주물과 제지 기계, 롤러를 생산했다. 제품을 가급적 일본으로 수출해 외화 획득에 나섰는데, 특히 인고트 케이스
같은 기기는 일본의 이천 제강에서 쓰게 하여 양 회사 간의 연결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그가 겪은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기술자의 관리 문제가 가장 속을 썩였다. 온갖 정성을 다해 고급 기술자를 일본에서 데려오면 어느 틈엔가 다른 회사가 빼가기
일쑤였다.
이 통에 심할 때는 공장의 라인 가동에서조차 차질이 빚어질 지경이었다.
그에 비하면 거래 회사마다 걸핏하면 어음을 일 년짜리로 끊어주는 바람에 운전 자금이 달리는 일 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국 1978년까지 이천 중기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던 서상록은 일선 경영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한국의 기업 상황은 서로 맞지 않았으며
시대가 적절치 않았던 탓도 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