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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부장관 기용설 등 풍문 나돌아
광목 사건은 끝내 씁쓸한 뒷맛을 안겨주는 일로 남았다.
막상 한국에 와서 그 뒷얘기를 들어본 상록은 어이가 없었다. 고생해가며 납품한 광목이 애초의 약속처럼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이번엔 그걸 팔아서 정부 운용 자금으로 쓰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말하나마나 그것은 정부의 재무 구조가 취약한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윤보선씨의 뒤를 이어 상공부장관 자리를 맡은 김일환씨와의 면담을 요청하기 전날 쯤 상록은 한국에 와있던 미국의 방직업자 네디라는 사람을
만났다. 같은 일을 하는 터라 그는 광목 완제품을, 그것도 일본 실정에서 왜 구하기 어려운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상록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그렇다면 자기가 함께 상공부장관을 만나 고생한 대목을 설명해주겠노라고 자청했다.
그러나 김일환 장관 앞에서 상록은 구차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었다. 김 장관은 상록이 고생한 사정을 휜히 알고 있었다.
김 장관은 마침 잘됐다며 제의를 해왔다.
“앞서의 일은 그렇게 이해하시고, 이번엔 물건을 살 사람이 마땅치 않아요. 그러니 서사장이 되사주실 수 있겠소?”
상록이 보낸 광목은 당시 시세로 총 12억원 가량에 해당하는 물건이었다. 그걸 상록이 되사겠다면 20억환에 넘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상록은 다른 사람이 살 경우 어느 정도에 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일시불로 살 경우에는 60억 환, 2회 분할이면 70억 환은 내야 건네줄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상록으로서는 최소한 50억 환은 남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처럼 억지를 부려가며 광목을 구해다 바친 것은 나라를 위한 헌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물건을 판다는 것부터
못마땅한 터에, 그걸 다시 사서 판다면 정부를 등에 업고 장사를 했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호의임에 분명한 김장관의 제의를 상록은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1949년 한국으로 건너온 상록은 이후 6.25를 전후하여 5년 간 조국에 머물렀다.
그동안 그의 거취를 둘러싸고 주위에서 갖가지 풍문이 떠돌아다녔다. 아마도 광목 사건이 한 두 사람의 입을 타고 퍼져나가면서 납품 과정과
뒤처리에 대한 상록의 태도가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진 게 아니었던가 싶다.
그 중에는 상공부장관 기용설도 있었고 정부가 운영권을 갖고 있던 중공업 회사 ‘한국기계’를 맡기려 한다는 풍문도 있었다.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을 지내던 김모씨는 실제로 상록을 찾아와 그런 움직임이 있음을 넌지시 일러준 적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치안본부장과
도지사를 지내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는 ‘한국기계’뿐 아니라 진해의 해군공장이나 영등포 방적 공장의 운영을 맡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며
상록의 의중을 살폈다.
상록은 그런 풍문이나 제의에 대해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심으로는 그도 귀국하던 시점부터 줄곧 할 일을 찾고 있었지만 생각처럼 여건이
좋지 않았다.
기업인으로 틀이 굳어진 그로선 사업 경험을 살려 일을 하고 싶었다. 기업을 운영하더라도 물론 지위 보장이나 이익 확보를 고려한다면 정부가
맡기는 공장이나 회사를 맡아 운영하는 것이 좀 더 쉬운 일에 속했다.
이천전기
1949년 12월, 상록은 ‘이천전기옥업주식회사’를 설립, 발족함과 동시에 인천시 동구 화수동 5-5번지에 있는 예전 도시바 공장을
정식으로 인수했다.
다행히도 일제시대부터 이 공장에서 일한 기술자들이 인근에 살고 있어 공장 가동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2,3년간 방치해둔 공장 시설 일부는 보수가 불가피했다. 상록은 예전 이천 방직을 설립해 가동에 들어가던 때의 경험을 살려 일본
이천 방직에 있는 기계 설비 기술자들을 불러 들여 기계 제작 및 보수를 맡겼다.
노후한 시설을 일부 보수하고 나니 어느새 해를 넘겼고, 이듬해 4월이나 되어서야 가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워낙 낡은 시설을 고쳐 시작한 터라 처음부터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생산품의 판매 과정에서 발생한 적자폭은 예상보다 컸다.
이는 배전기기를 구입해줘야 할 회사의 인식이 부족했던 탓도 있다.
당시의 전기 생산 회사는 서민호 사장이 운영하는 현 한전의 전신‘조선전업’이 있었다. 배전 업무를 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및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을 맡은 ‘남전(남선전기주식회사)’과 서울 중심으로 인천, 춘천 등지의 전기 공급을 받은 ‘경전(경성전기주식회사)’이 임무를
나누어 맡고 있었다.
배전회사는 지역별로 담당토록 한 까닭은 국가 관리 아래 민영화를 추진해 간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정부를 한편으로 새로운 전원
개발 사업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시설을 유지, 발전시키자는 별도의 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로서는 빗발치는 전력 공급 요청에 따라가기만도 바쁜 터라 도전과 누전을 막는 새로운 기기의 구입과 설치에는 자연 등한할 수 밖에
없었다.
상록은 점점 커져가는 적자를 확인하면서도 언젠가는 이천 전기의 가치를 알아줄 날이 있으리라 믿고 계속 공장을 가동시켰다. 당시 중전기기
회사는 이천전기 밖에 없었으나 차차 일반인들이 변압기와 전동기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상록이 예상했던 대로 회사는 호황을 누렸다.
1958년 7월 이천 전기는 펌프 전문 제작 업체인 대동공업주식회사와 손을 잡으며 양수기 생산에 돌입했다.
이천 전기에서 만드는 전동기나 양수기는 모두 우리 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59년에는 국내 최초로 22킬로 볼트급 특고압
변전기를 서울시청에 납품하는 등 국내 전기 보급에 기여했다.
1961년 7월에는 재해 대책용 펌프 도면을 전국기계공업에 공개, 원간 1만 1천대를 생산케 하여 국가적인 재해를 극복하게 했다.
이러한 공로로 1954년에는 펌프 우수 제품 생산으로 농림부장관상을 받은 것을 비롯, 1955년 12월 산업박람회에 펌프를 출품했다. 이어
1958년 12월에는 정부수립 19주년 전시회에 전동기를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는 등 각종 표창 및 포상을 받았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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