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창 업
‘담보 없이 100만엔 이하는 언제나 대출해 주겠다’

고소리에서 요시다 제철과의 일을 정리한 서상록은 이천 공업을 나고야 시내 쓰기시마로 옮겨 재창업하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구상했던 대로 점차 섬유산업으로 진출할 채비를 갖추었다.

방직기는 이천 공업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만들도록 하고 배급제로 타는 원사를 받아다가 천을 짜낼 생산 계획을 빈틈없이 세웠다.

당시 생필품이 부족해 배급하는 원사량 구입 또한 절차가 무척 까다롭고 철저하였다. 서류를 갖춰 원사를 신청하자 담당 직원이 공장으로 찾아 와 방직기 대수를 헤아려 갔고, 그 대수에 맞춰 대당 얼마씩의 원사를 나누어 주었다.

이런 사정은 방직과 유사업종인 방적(紡績)산업에서도 동일해 솜마저도 배급제로 나눠주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회사 설립 과정에서 자금 사정만은 생각보다 원활하게 돌아갔다.

공습으로 공장이 타버린 데다 요시다 제철에서 번 돈 거의 대부분을 고소리 소학교 복구에 털어 넣었으니 남은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희망이 있었다. 그에겐 아직 신용이 남아 있었다. 훗날 그 신용은 새로운 부의 창출 과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5년 10월 어느 날, 예전에 요시다 제철의 소개로 120만엔을 빌려주었던 '흥업은행'을 찾아갔다. 전에 빌린 120만엔을 갚기 위해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쟁 중 일을 기억하는 담당자조차 남아 있을지 어떨지도 몰랐다. 주위의 누군가가 권한 대로 그 돈으로 신규 사업을 시작할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마음이 찜찜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록에게 전후 사정을 들은 은행 대부 담당자는 마치 대낮에 유령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었다.

"빚을 갚다니요? 빌려간 근거가 확실한 사람도 갚지 않으려고 몸을 숨기는 판인데 돈을 갚겠다고 제 발로 찾아오신 분은 처음입니다"

상록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다릅니다. 한때나마 도움을 줬던 사람을 그런 식으로 배반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은행 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만 설령 돈을 돌려주신다 해도 저희로서는 당장 받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선 일본의 앞날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판에 그 돈은 받아 무엇하겠습니까? 아무튼 사장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하는 수없이 상록은 돈을 움켜쥐고 은행에서 나와야 했다. 그렇더라도 이왕 남의 것으로 인정한 돈을 쓸 수는 없었다.

얼마 후 1946년 1월 은행에서 연락이 왔다. 금융권이 회복되었으니 최소한의 원금을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은행은 상록에게 유리한 조항을 달아 주었다.

당장에 갚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천천히 갚아도 좋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상록에게만 담보 없이 100만엔 이하의 금액이라면 언제라도 빌려주겠다고 통보하였다. 상록의 사람 됨됨이와 신용도를 높이 사겠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상록이 놀랐다.  

100만엔이면 당시 큰돈이었다. 맥주 한 병에 45전, 쌀 한 섬(80kg)에 4엔이던 시절이었으므로 그 정도면 웬만한 회사의 설립 자금으로 충분했다.

회사에 돌아온 상록이 경리인 나카무라에게 말하자 그가 기뻐하며 말했다.

"그런 돈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빌립시다."

그의 말대로 상록은 즉시 95만엔을 빌려 이천공업의 복구와 이천방직의 신규 설비에 투자하였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