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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금하 서상록(徐相錄) 16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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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승인 2009.06.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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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하나를 만들면 나는 두 개를 만든다’

기차부속품 납품으로 소득을 창출할 수 있었던 데는 그동안 꾸준히 축적해온 이천 공업의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일감이 늘고 공장이 커지면서 서상록은 소위 회사운영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람을 쓰고 인건비를 지급하는 방식에서 철저하게 능력제일주의 원칙을 채택했다.

다른 공장에서 1엔을 주는 기술자에게 상록은 1엔 20전을 주었다. 이를 지켜본 동생과 경영 보좌진들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종업원들은 1인당 한 개를 만들 수 있는 시간에 두 개를 만들어 상록에게 고마움을 보답하였다. 20전을 더 주고 80전이 남는 셈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그는 생산품의 품질 관리를 강화해 제품의 결손율을 최소화하면서 ‘남이 하나를 만들면 나는 두 개를 만든다’는 원칙으로 회사를 경영하였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시국이 혼란스러웠지만 상록은 개의치 않고 생산라인의 자동화를 목표로 일단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본이 어느 정도 축적된 후에는 원자재 구매에서도 얼마간의 이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남들 같으면 외상으로 5엔을 주고 살 물건을 상록은 현금으로 4엔에 사들였다. 그러면 1개당 1엔씩이 남아 그것으로 더 많은 물건을 사들일 수 있었다.

전쟁 중이라 현금이 귀해 상록에게 자재를 납품하는 사람들이 공장으로 몰려왔고, 그렇게 만들어낸 생산품들은 다시 민수용 제품이 귀하던 당시로서는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전쟁 야욕을 채우려는 일본 정부의 끝없는 야욕이 획일화된 군수 경제로 산업을 몰아넣는 상황에서 자신의 고유 업종을 지키면서 기업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1940년에 ‘임금통제령’이 제정, 공포되면서 이제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어떤 산업체도 함부로 처신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앞서 1938년 3월에 공표된 ‘국가총동원법’은 인원과 물자, 시설, 자금을 비롯한 경제 활동에 소요되는 모든 요소를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법이었다. 이 법은 전쟁을 위하여 국내의 온갖 자원을 총동원하려는 의도 아래 법률과 세목을 정하고 있었다.

이 법에 공표됨에 따라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을 받지 않고는 최소한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닥쳤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고, 무엇보다도 인력 수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1938년 여름, 군수공업품을 생산하지 않는 중소기업에서만 무려 13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발생해 전국의 거리로 나앉았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군대로 징집되어 가거나 상대적으로 노동자 부족 사태를 겪고 있던 군수 공업분야에 투입되었다.

국가총동원령의 여파는 오사카의 금속공업계에도 미쳤다.

이에 상록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였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최선을 다해 종업원을 책임질 터이니 함부로 이적하지 말기 바란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작업대를 움켜쥐고 최고의 품질을 지닌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하라.”

상록이 흔들리지 않은 모습을 보이자 종업원들은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와중에 이천공업은 오히려 괄목할 만한 기술혁신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만만치만은 않았다. 진작부터 오사카 공업계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일본 정부는 ‘국가총동원’을 앞세워 철강을 다루는 공업소를 하나씩 수용해 들였다. 그러다 종국에는 인근에 있던 한국인 사업가의 공업소 8개마저 정부에 수용될 위기에 처했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음을 안 상록은 앞장서서 담당자를 찾아다니며 수용을 만류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미 자진해서 군수 공업분야의 일을 떠맡고 나선 사람들이 많은 터에 민수용 공장까지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까?. 만약 한국인 사업가들이 제 발로 군수 공업 쪽으로 뛰어드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 무리하게 총동원령을 앞세워 생산력을 저하시킨다면 당신네 국가에도 결국 손해가 아닙니까?. 그리고 민수용 공장의 시설과 인력은 살려 놓아야 평화시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득 작업이 주요했던지 이천공업을 비롯한 한국인이 운영하던 인근 공장은 수용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상록의 설득작업이 성공을 거두자 오사카 한국인들 사이에 서상록의 이름이 퍼져나갔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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