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종/시인

요즈음 들녘은 넉넉하다 못해 황홀하다. 색채에 무감한 사람도 주변 산야가 지닌 형형색색에서 특별한 느낌에 빠지게 한다. 봄, 여름의 땀과 노역을 거쳐 약속된 시기에 여물이 들고 소출과 결실로 이어진 계절이 가을인 때문이다. 오곡백과에서 얻어진 이 계절의 절정감은 드넓은 나주 들녘이라 여느 지역에 비해 크고 풍성하고 아름답다.
 
오곡백과는 어디에서 오는가. 늘상 대하는 현상이라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나사처럼 조여진 ‘꼭지’라는 손

▲ 김종 시인

가을은 오곡백과가 완성되는 계절이다. 이들 결실은 놀랍게도 그 열매를 틀어쥔 야무진 작은 손에서 비롯된다. 나사처럼 조여진 ‘꼭지’라는 손이 저마다의 열매를 떠받치고 있음이다. 꼭지는 열매나 잎사귀의 이음새 부분이다. 어의상으로는 가지에 열매가 달려있게 하는 줄기이며 ‘열매의 꽃받침이 붙었던 자리’나 ‘배 한가운데에 있는 탯줄을 끊는 자리’로 정의된 ‘배꼽’과 그 의미가 상당부분 통한다. 그리 보면 꼭지는 세상의 모든 열매를 생겨나게 하고 익어서 떨어질 때까지 잡아주고 받쳐주는 후견인적인 부분이다.
 
필자는 조물주의 은택이 황금물결로 넘실대는 이 계절의 절정감은 꼭지의 음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자못 교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다분히 꼭지의 헌신과 봉사에서 생명을 장양하는 곡식이나 열매가 소출된다는 사실을 되풀이 말하는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아도 나지 않게 소임을 다하는 꼭지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 참으로 배울만한 메시지를 들려준다. 곡식이나 과일이 위대해도 꼭없이 가능할까. 그래 ‘용마 나고 장군난다’는 표현처럼 ‘꼭지 나고 열매있다’는 격언 하나쯤 빚어질 법 하다.
 
우리는 꼭지를 통해 배우는 것이 많다. 어떤 열매도 우선 꼭지 없이는 불가능하건만 꼭지는 받쳐 든 열매에 비해 심히 작다는 사실이다. 애써 들여다봐야 보일만큼 왜소한 뒷전차지가 꼭지이다. 꼭지는 풍우와 천둥번개가 위협적이어도 받쳐 든 손을 놓아버리는 일이 없다. 끝까지 인내하면서 열매의 충분한 숙성까지 소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꼭지는 뛰어난 연출솜씨 또한 소유하고 있다. 뭐랄까. 버튼 눌러서 켜고 끄는 리모컨도 아니건만 꼭지로 받쳐 들면 세상만물이 과일처럼 익어 단물이 고일 것 같다. 아니, 해와 달도 꼭지에 올리면 먹음직한 과일이 되고, 하늘의 저 별무리도 별사탕과일? 방울토마토?  이보다 맛있는 열매들로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꼭지가 지닌 특징에서 몇 가지 정신 또한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꼭지는 묵묵하다는 사실이다. 그 작고 볼품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임에도 섭섭해 하지 않고 열매를 말없이 지켜낸다는 것, 생각만 해도 대견하다. 그러니까 일단 꼭지위에 올려지면 과일의 일생은 안심해도 된다. 남의 간섭이나 위협에 개의치 않고 제 소임을 완성하는 정신은 꼭지가 지닌 남다른 미덕이다. 그런 꼭지이기에 혹간 보셨을지 모르는,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등속에서 뒷덜미 보이는 열매를 허리를 휘면서까지 붙잡고 있는 것을.
 
거듭되지만 꼭지는 열매를 틀어쥔 자그마한 손이다. 이 손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매를 지켜내는 참으로 귀한 책임감을 읽을 수 있고 힘들다 말하는 법이 없다. 꼭지 자리가 깊을수록 더 좋은 맛의 열매가 익는다는 사실과 함께.
 
그런 꼭지에는 무슨 ‘사심’같은 게 없다. 사심은 달리 말하면 순수하지 못한 ‘딴마음’이다. 세상을 경영하는 자는 일차적으로 사심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바 소임 앞에 겸손하며 정성과 노력을 보태야 한다. 꼭지는 맑은 정신에도 나아가 있다.

좋은 정치는 더불어 배부른 세상 찾아가는 일

세계적으로 진정 성공한 지도자는 마음이 맑고 깨끗한 자이다. 사람이니까 하는 일에서 성패는 갈릴 수 있고 잘못한 일은 개선하면 된다. 허나 사심이 개입한 의도적인 잘못은 그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성공한 지도자들이 지닌 사심 없는 마음은 꼭지가 지닌 전체정신으로 통한다. 아르키메데스가 “나에게 설 땅과 지렛대를 다오. 그러면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고 장언하였던 것처럼“나에게 꼭지를 다오 삼라만상을 단물 고인 과일로 숙성 시키겠다”는 표현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가을이다. 집 없는 자들도 집을 지어야 하고 비어있는 곳간도 그득해질 것이다. 좋은 정치는 사사건건 트집 잡고 늘어지며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손잡고 배부른 세상을 찾아가는 일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꼭지 되어 당도 높은 과일들을 숙성시키는 일이다.
 
금년에도 보상가 등의 문제로 농민들의 시름이 겹겹 산중일지 모른다. 허나 세상은 일단 풍년이 들어야 따뜻하다. 생명의 땅, 민족의 식량창고 나주가 넉넉하다 못해 황홀한 절정기를 맞고 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했다. 풍요와 화락을 목표한 나주의 백년대계는 바른 꼭지 정신의 뒷받침을 이어가야 한다. 어찌 백성들의 깊은 시름에 내려가지 않고 들녘의 풍요가 물결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