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영은 원래 제목을 정해 놓고 시가(詩歌)를 짓거나 또는 이렇게 해서 제작된 시가를 말한다.

누정시는 누정명이 시제(詩題)로 전제되거나, 그곳에 있었던 일 또는 누정 주변에 펼쳐진 자연경물 등의 명명(命名)이 시제가 되므로, 누정의 출입으로 말미암아 누정과 연관되어 지어진 시가를 모두 누정제영이라고 이른다.

누정제영이라 하면 으레 한시(漢詩)제영만을 위주로 생각하고, 국문시의 제작은 염두하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누정을 제목으로 한 작시(作詩)는 가사(歌辭)나 시조(時調)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누정문학은 한문의 누정시문(時文) 뿐만 아니라, 국문의 누정시문까지 일괄하여 그 대상으로 해야 한다.  나주지역의 누정 수는 296개로 집계되고 또 이에 대한 누정시의 작자(作者)는 545명에 이른다는 것을 이미 지적하였다.

그래서 편의상 누정시가 많은 대표적인 누정을 골라 제영 고찰로서 나주지역 누정제영의 실제로 대신하고자 한다.

계은정(溪隱亭) 제영(題詠)

계은정은 다도면 풍산리 도천부락 뒤편의 산 중턱에 있는 정자 이름이다.

고종 때 인물 계은(溪隱) 홍대식(洪大植)이 이곳에 은거하여 계림지간을 소요하며 뜻을 좇아 자연의 산수와 지내다 그가 죽은 9년 뒤 1927년 봄 병희와 태희의 두 아들이 선친의 장수지소(藏修之所)를 기념하고자 그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계은이라 하였다.

민낙호(閔洛鎬)가 계은정 원운(原韻)에 근차(謹次)한 다음의 누정시의 내용을 보면 계은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옛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풍산(楓山) 밑 도천(道川)의 언덕에 정자를 짓고, 낚시 옛터에 놀았다 드니
북쪽 군봉(群峰)에는 연가(烟?) 쌓여 있고, 서쪽 곡수(谷水)엔 日月의 빛
세상 태평하여 창랑곡(滄浪曲) 부르며 효심이 끼쳐져서 堂  경영을 즐겼다 드니
계은옹(溪隱翁)은 지금 어디 있는지 홀로 피리 불던 자취 세상에 전해져 옴이 덧없기만 하네.

▲ 누정-계은정

이 계은정에는 네 개의 누정기가 걸려있다. 정묘년 1927년 하순에 쓴 둔제(遯齊) 문달환(文達煥)의 누정기 등이 있어 계은정 건립의 유래와 그 뜻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 후택(後澤)과 돈제는 한시문으로 잘 알려진 누정시인이다. 계은정의 누정제영에는 17명이 쓴 누정시가 전한다.  그 중 고경명의 후손인 고광선의 누정시가 전해오고 있다. 고광선은 계은 홍대식과는 동갑인 한말의 제상이다.

장흥이 고향인 그는 계은정 제영의 시서(時序)에서 ‘漁隱洪公是我同庚(어은홍공시아동경) 而今焉修文地下(이금언수문지하)’인고라 적었다. 이는 같은 나이의 계은이 먼저 세상을 떠남을 한스러워 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각 지방의 누정에 많은 제영을 남긴 누정시인이다. 계은정 제영 외에 노안면 영평리에 있는 면향정(免香亭)에 1931년에 쓴 ‘次면향정’시가 있다. 다시면 운봉리에 있는 칠두정(七頭亭)의 중수기도 고광선의 작이다.

또 다른 제영을 쓴 문재희(文載熙)는 남평 출신으로 문백수(文白修)의 후손으로 최익현에게 사사(師事)하여 시문을 익혔다.

화순 출신인 최태원(崔泰遠)은 다음과 같은 제영을 섰다.

계옹(溪翁)의 놀던 예터 정자를 짓고 어른의 풍류를 회상하노라
쇄락(灑落)한 헌창(軒窓)에 솔바람 일고 그윽한 섬돌에 추국(秋菊)이 피면
언덕 올라 읊조림이 참된 풍류라 부세(浮世)의 공명이란 꾀하지 않네
원컨대, 현가(賢家)의 아드님 정자를 가꿔 천석(泉石)에 어린 어른의 자취 전해 주소서.

17명 가운데 6명의 홍씨가 제영을 썼는데, 이는 홍씨 가문이 시문에 뛰어난 사람이 많아서 일가 친척들이 경영하는 누정 제영에 직접 참여한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