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왜선 14척을 보았다는 수채관의 보고가 있어서 이미 그대로 상부에 보고를 마친 상태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큰일 납니다. 나머지 13척의 배는 어디에 숨겨 두었소?”

그들은 최부 일행을 왜구로 오인하고 있었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자백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우리 배는 단한 척 뿐입니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최부의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왜군으로 인정한 듯한 자세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가 답답해지고 이상한 기류가 방안을 감돌았다.

“우리가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는 중국 사람들의 배가 여섯 척이나 함께 떠 있었습니다. 제 말이 믿어지지 않다면 그들에게 물어서 확인하세요.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들은 틀림없이 왜인들이 맞소? 어째서 거짓말만 하는가? 이곳에 상륙해서 무엇을 도둑질하려했는가?”

“나는 조선의 선비입니다. 왜놈들과는 말도 틀리고 입고 있는 옷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놈들은 조선의 해안까지 침범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바다의 깡패들입니다. 그놈들과는 비교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인은 도둑질하는데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소. 옷을 바꿔 입고 조선인처럼 위장하고 있다면 그대들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요? 이실직고하시오!”

“답답하십니다. 저는 분명히 조선인이요. 우리의 행동거지를 보거나 제가 가지고 있는 인신과 마패, 관대와 관복, 문서나 서류 등을 보시면 제가 분명히 조선 사람임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 배는 불행하게도 해적과 날강도들을 만나 배안의 모든 물건들을 도적맞았지만 국가의 중요한 문서와 신표가 될만한 것들은 끝까지 지켜 가지고 있습니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잠시 심문을 중지하고 최부가 가지고 있다는 물건들을 가져오도록 했다. 다짜고짜로 따지듯 말했다.

“당신은 왜인으로서 이런 것이 없었을 터인데 이는 필시 조선인한테 빼앗은 것이 아니요?”

“아닙니다. 조선의 선비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제 것이 맞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시면 나를 북경으로 보내 조선국 통역과 말할 수 있게 대질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제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실 것입니다.”

심문자들은 왜구가 아니라는데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의 성명이 무엇이며 어느 주, 현 사람이요? 어떤 관직에 있었으며 무슨 일로 중국의 국경을 침범해서 도착했는지 글로 쓰되 거짓말이나 속임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상부에 보고할 것이오.”

“저의 성명은 최부(崔溥)이고 조선국 전라도 나주 성(城) 사람으로 문과에 두 번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작년 9월 국왕의 명을 받들고 제주도에 가서 공무수행 중에 있었는데 금년 윤달 정월 초사흘에 부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폭풍을 만나 여기에 닿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성명과 관직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사망했소?”

“부친의 이름은 택(澤)이며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모를 공양하기위해 벼슬은 하지 않았습니다. 상복을 벗은 지 겨우 4년 만에 나주에서 사망하셨습니다.”

공술이 끝나자 숙사로 돌아갔다. 일행의 책임자인 최부는 특별 대접으로 별도의 숙사를 정해주고 나머지일행들은 함께 머물도록 조치했다.

왜구라는 오해는 좀처럼 풀리지 않고

공사 간에 제주도를 왕래하다가 풍파를 만나 뱃길을 잃고 바다 속으로 사라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 살아서 돌아온 자들은 겨우 몇 명에 불과할 정도였던 것이다. 예측이 어려운 바다날씨는 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이를 어찌 배가 침몰되어 일어난 사고라고만 하겠는가?

그들 중에는 표류하다가 외딴 섬이나 멀리 떨어진 타이나 베트남중부지방까지 떠밀려 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멀리 표해 된 사람들은 살아 돌아올 가망이 거의 없었으며 혹시 중국 땅에 표착된 사람도 왜인으로 오인되거나 왜적으로 무고당하여 죽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침략이 잦은 왜구를 막기 위해 애를 쓰던 중국의 정책에 의해 왜구를 잡아오면 후한 상을 내렸다. 조선 사람들은 왜구로 몰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자들도 많았다. 상을 받고자한 자들은 불문곡직하고 머리를 잘라 바치는 일이 흔했다. 왜구의 뿌리 깊은 침략 근성이 중국 땅까지 스며있음을 말한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왜구는 타도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무찔러야 했다. 야만적이고 포악한 왜는 보이는 즉시 처형시켰다. 그렇지만 조선과 중국은 우호적 외교관계로 서로 믿음이 돈독했으며 사신 단이 왕래하며 충분한 무역도 이루어지고 있던 사이었다.

최부도 재빨리 배에서 내려 뭍에 올랐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더라면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을 것임은 뻔한 사실로 드러났다. 아찔한 위기일발의 순간이다. 말만 다를 뿐 생긴 모습이 비슷한 일본과 조선인은 선뜻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런 이유로 어처구니없게 죽음에 이른 조선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통터지는 노릇이라 하겠다.

최부는 혼자서 생각해보았다. 만약 바다에서 만난 해적들에게 인신과 마패를 빼앗겼더라면 심문이 쉽게 끝나지 못하고 화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믿어진다. 여차했더라면 죽음의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조선에서도 중국처럼 문무백관에게 직책과 성명을 적은 호패(號牌)나 석패(錫牌)를 주어 일반사람이 아니고 벼슬아치임을 알게 해야 한다. 대소사신에게는 비표로 절월(節鉞)을 주어 사용하고 난 깃발을 간직하고 나라와 국왕의 존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닷가 주민과 먼 길을 드나드는 상인들에게도 국적, 주소, 성명, 성별, 생년월일 등을 기재한 호패를 주어 항상 가지고 다니게 해야 할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제주에는 통역을 배치하여 사신이나 제주 3읍 수령들이 오갈 때 늘 같이 다니게 하면 예기치 않은 환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날씨가 흐렸다 겠다를 반복했다. 최부일행이 도저고성에 머무는 동안 고성의 천호는 최부가 머리에 쓰고 있는 갓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쓰고 있는 것은 무슨 모자요?”

“상립이라고 하는데 상을 당한 사람이 쓰는 갓이랍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으로는 친상을 당한 사람은 상립을 쓰지요.”

최부는 장례도 아직 치루지 못했으니 오죽이나 답답하겠는가.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으로 표류를 당하거나 부득이 먼 곳을 가는 사람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으므로 피눈물 나는 슬픈 마음을 감추고자 상립을 쓴다고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