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급한 일이 있기로서니 잠시 쉬었다 갈 수 있게 하시구려. 전쟁포로라도 이렇게 학대할 수는 없는 것이오.”

주민들의 숫자가 적은 작은 마을이었다. 최부는 그에게 표류의 사정을 말했다. 말을 다 듣고 난 그는 최부 일행을 가엾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딱하기도 해라….”

측은하게 여긴 그는 술을 가져와 먹도록 권했다. 술을 본 최부는 한 모금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차마 마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복을 입은 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꾹꾹 참으며 술을 마실 수 없는 사정을 말했다.

“조선 사람들은 친상(親喪)을 당하면 3년 상이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물론 매운 음식이나 고기와 맛있는 음식도 먹지 않습니다. 고맙게도 귀한 술을 내놓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상중(喪中)의 몸이라 사양하겠습니다.”
“그렇기로서니 원…. 그렇다면 몸을 풀어야 할 태니까 차(茶)나 좀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왕을원 선비가 집안 부인을 시켜 가져온 차는 특별했다. 차 문화를 즐기며 생활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그들만의 차는 유별났던 것이다.

노선비가 차를 권하며 한 말속에는 중국차에 대한 깊은 뜻이 절절이 담겨있었다. 물은 인간이 구성된 근본이며 사물을 맑게 해준다.

사물의 근본이 물이며 결국 물이 차를 만들어주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물은 철학이고 존재의 근원이라는 중국선비의 해석이었다.

차(茶)는 맑은 물이 원천이고 차야말로 물에다 띄운 꽃잎과 같다. 중국인들에게 식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차 문화는 음식물의 섭취로 오염된 장을 세척한다는 의미도 있고 세태에 찌든 사람들의 생각을 고고하게 우려내는 청량제 역할을 해준다.

그렇게 본다면 한 잔의 차는 머리를 식히고 생각의 싹을 키우는 사유(思惟)의 원천이다. 수많은 생각들을 다듬고 가라앉히며 되짚어 궁리하게 하는 데는 차가 제일이다.

사려 깊은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차는 일상의 물처럼 편하게 대한다. 은퇴한 선비는 자신의 손으로 만든 차라고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았다.

“내가 만든 차는 영물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떠올리게 해주고 혼을 빼앗기도 하며 지혜도 길러준답니다. 많이 드시지요. 생각하는 지혜의 샘이 차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잡이 준다니 고맙습니다. 바다에서의 지옥 같은 악몽도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부의 일행들은 술잔을 나누며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술 대신 차를 택한 최부는 그윽한 차의 향에 넋을 잃었다.

기이한 풀로 대접받는 차가 천지의 형태를 잊게 하고 조화를 창조하며 먼지를 없애주는 것으로 알았지만 설마하니 이런 특이한 향이 최부의 가슴을 녹여버릴 줄은 몰랐다.

“차란 근심을 없애는 인간의 보물이랍니다.”

중국의 늙은 선비는 인심도 후했다. 최부의 찻잔에 차가 바닥을 드러내기가 바쁘게 손수 가득히 따라 주었다.

“마음껏 마시세요.” “너무 감사합니다.”

은 선비 왕을원은 자기 집에서 가장 아끼는 차는 롱징차[龍井茶]라고 하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백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도 그렇지만 롱징차는 항저우 시후[抗州 西湖]의 차로서 유명하다.

항주 서호는 녹차의 생산지로 유명하지만 그림 같은 호수가 시가지의 중심을 흐르고 있어서 물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진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갈 길은 먼데 차(茶)자랑은 계속되고

서호 주변의 녹차 밭은 항주를 찾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세계최대의 도시인 상하이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있어서 봄이나 여름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아드는 곳이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쑤쩌우 항쩌우[蘇抗]가 있다.”

이런 말은 항주의 경치도 아름답지만 서호와 용정차가 있어서 지금껏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부가 차를 음미하며 깊이 마시는 모습을 본 퇴역 선비는 자신이 생산한 용정 차의 자랑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최부에게 필요한 것은 지친 몸을 편하게 쉬는 것이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 없었고 관심도 없는 차(茶)자랑을 들어야 했다.

중국황실에서 가장 고급차로 대접받으며 애용되는 차가 롱징차다. 골치 아픈 일들을 결정하고 명을 내려야 하는 황실에서는 롱징차만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맛이 톡 쏘는 독특한 맛이 애음가들의 혀를 당긴다고 한다.

롱징차는 발효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살짝 말려서 무쇠 솥에다 넣고 볶아대야 하지만 화력이 세지 않는 적당한 불에 짧은 시간을 볶는 것이 기술이다.

왕을원은 투명한 유리잔을 꺼내왔다. 롱징차는 유리잔에 마셔야 맛이 난다고 하면서 자랑했다. 그 이유로는 롱징차는 입으로만 마시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도 마신다고 했다.

“눈으로 차를 마시다니요?”

그는 맑은 유리잔에 자신이 만들어낸 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부었다. 그러자 신비한 현상이 벌어졌다.

"와, 차 잎새가 다시 살아나 너울대며 춤을 추네요.”

찻잔 속에서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던 차 잎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조금씩 본래의 잎으로 펴지는 모습이 살아 숨쉬는 잎으로 변한다. 처음 보는 차 잎의 살아 꿈틀대는 모습이다. 재미있고 황홀한 광경이었다.

건조된 차가 뜨거운 물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면서 유리잔 아래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광경을 여유 있게 감상하며 마신 녹차는 최부의 막힌 가슴의 숨통을 터주기에 충분했다.

인심 좋은 중국의 퇴역 선비는 녹차를 마시려고 물을 부을 때 유의해야 할 점도 말해주었다. 먼저 차를 잔에 넣고 찻잔에 물을 따른다고 했다.

이때 뜨거운 물을 찻잔의 삼분의 일까지만 붓는다. 잠시 삼분동안 기다린 뒤에 마른 찻잎이 물을 흡수한 후에 컵에 물을 채운다.

뜨거운 물을 찻잔에 먼저 붓고 그 위에다 차를 띄우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마시는 방법은 뜨거운 물을 먼저 붓고 차를 넣는 방법을 쓴다고 했다.

큼직한 유리컵이 테이블위에 있었다. 녹차를 마실 때만 사용하는 잔으로 티 하나 없는 투명한 모습이다. 스스로 만든 녹차를 유리잔 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맛으로 마시는 것이 녹차의 진 맛이라고 자랑했다.

중국인들에게 차는 필수품이다. 항상 차병을 가지고 다니면서 차를 마신다. 길을 갈 때도 겨드랑이나 가방 속에는 꼭 차를 넣고 다닌다.

중국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매우 오래 전부터다. 음식의 맛을 알고 나서부터 차를 마셨다고 한다. 그들이 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차를 제조하는 과정에서부터 깨끗하게 건조한 청결한 차는 색체와 향기와 풍미가 있어서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