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부터 ‘좌파’의 몰락까지

작년 12월, 본지 283호 ‘투데이 추천도서’ 독자들에게 소개됐던〈핀란드 역으로〉를 번역해 우리에게 낯익은 유강은의 새로운 번역서 《더 레프트》.

《더 레프트》는 사진 한 장 없이 1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나주투데이 독자들에게 추천도서로 권장하기 위해 책을 구입했지만 솔직히 워낙 방대한 분량에다, 본지 사무실 이전으로 시간이 여의치 못해 한꺼번에 다 읽지 못하고 필요하다 싶은 부분부터 먼저 읽은 점을 밝혀둔다.

1860년대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 책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수반한 위기의 해결로부터 1968년 이후의 신사회운동을 거쳐, 1989?92년의 재구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범유럽 차원의 혁명적 국면들을 헤쳐보이고 있다.

▲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옯김

이 책은 2월 혁명을 위시한 일련의 혁명이 유럽을 휩쓸던 1848년부터 유럽의 좌파 전통이 몰락했던 2000년까지, 150여 년 동안 유럽에서 펼쳐진 이념과 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했다.

여기서 좌파는 온건한 사회민주당에서부터 볼셰비키에 이르기까지, 비밀무장투쟁 옹호론자들에서부터 1968년 이후의 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력을 아우른다.

4부로 구성된 《더 레프트》는 1부에서는 1848년 혁명이 패배한 직후인 1860년대부터 1차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를, 1914?23년까지를 다룬 2부에서는 의회 민주주의의 대안을 추구한 새로운 공산주의 운동의 등장을 이야기 한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56년까지 이어지는 3부에서는 대공황과 파시즘의 충격 및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여 서유럽에서 의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가 확립된 과정을, 1968년 이후를 다루는 마지막 4부에서는 기존의 개혁주의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추구한 신사회운동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유럽 좌파의 성공과 실패, 최고점과 최저점, 업적과 부족한 점과 지나친 점, 그리고 무엇보다 유럽 정치의 풍경을 형성하고 지속적으로 모양 지은 유럽 좌파의 영향이 모두 담겨 있다.

“이 책은 단연코 묘비명이 아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동서유럽의 공산주의가 기획을 상실하고, 사회민주주의가 야심을 잃고 움츠리고, 소련이 지도상에서 사라지는 과정을 다루면서 일련의 종말을 서술했다면, 또한 동시에 새로운 정치가 생겨날 수도 있는 공간을 탐색했다. 특정하게 구체화되고 신뢰를 상실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이제 ‘사멸’해서 문서 저장고의 한 칸을 차지하는 게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사회주의 전통에는 여전히 풍부한 자원이 남아 있다. 사회정의의 문제가 정치의제에서 영원히 추방당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가 마침내 윤리적?평등주의적 비판에 대해 면역력을 갖게 되지 않는 한, 사회주의의 주장은 여전히 급진적 민주주의의 희망을 위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p911 중에서

즉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했지만 사회주의적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지은이의 결론이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좌파의 흥망성쇠, 공(功)과 과(過)를 냉철하게 펼쳐 보인다. 그는 “이 책을 쓰는데 20년이 걸렸다”며 “이 과정에서 몇몇 소중한 가설과 고이 간직해온 신념을 기꺼이 재고하고 포기해야만 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이 책에 공을 들인 모양이다.

저자는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결론짓고, “이 역사는 분명히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가 존재, 발전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좌파는 유효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저자는 “세계화는 창의적인 정치적 관심을 필요로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세계화의 독특한 사회관계가 무엇이며, 현재 어떤 형태의 문화와 신념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문화와 신념체계를 둘러싸고 어떤 형태의 정치가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충고하고 있다.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다소 부담은 가지만 4·9총선 결과를 볼 때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