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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 ⑥일본군과 전투 벌이고자 서안으로 이동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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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호] 승인 2008.01.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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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공작대의 구성원 나이는 20-30대의 젊은 청년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나월환, 박기성, 김동수, 이해평, 김인, 김원형 등은 군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나월환과 박기성을 제외한 김동수, 이하유, 이해평, 김인, 김원형, 조시제 등 주요 간부들은 전지공작대 결성 이전에 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리더역할을 했던 이하유는 김구계열의 인물로서 무정부주의 사상을 갖고 있던 인물이어서 그는 나월환, 박기성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김구계열 인물들과 중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중경에서 조직된 전지공작대는 얼마 뒤 섬서성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그것은 공작대가 무엇보다 우선 한·중 연합을 통하여 일선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장개석의 휘하 호종남 부대가 서안에 주둔하면서 서북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호 장군의 스승 엽정수(葉淨秀)와 그의 비서이자 결의형제인 호보일(胡保一)이 무정부주의자였는데, 그들의 노력으로 전지공작대는 호종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호종남 부대의 배려로 ‘전시공작간부훈련제4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이하 한청반)이 신설되었다.
 
서안으로 이동한 전지공작대원들은 막바로 작전에 투입될 수 없었다. 그들은 1940년 1월 의료대를 조직하여 2주동안 드라코마 박멸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1월 4일 나월환이 서안에 도착해 국민당 정치기관을 방문하여 논의한 결과, 그들의 활동 방향이 정해졌다.
 
논의 끝에 1940년 3월 호종남부대에 제1기 한청반이 조직되었다. 4월부터 훈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때 나월환은 담화를 발표하여 전지공작대의 공작방침을 선포하였다.

대장 나월환은 전지공작대의 역사적 임무를 『한국청년』(제1권 1기)에 실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자유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현재 매 한국인의 어깨위에 더욱이 한국청년의 어깨위에 짊어진 역사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한국내에 소유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쫓아내는 것이고 자유독립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삼천만동포로 하여금 식민지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어 화평하고 행복한 나날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지공작대 구체적 임무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그 임무를 요약해 보면 중국항전에의 협력, 선전활동, 첩보활동, 무장대 조직, 혁명사상 고취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전지공작대는 그들의 활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기관지 『한국청년』을 통하여 한?중연대의 강조와 필요성, 조선민중에 기초한 무장부대의 건립, 그리고 한인간의 단결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또한 나월환은 『한국청년』(제1권 2기)에 「우리들은 어떻게 한국무장부대를 건립할 것인가」라는 내용을 실어 전지공작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설정하였다.

‘현재 우리들의 행동부대는 적후방에 잠시 머무르거나 혹은 일부지역에서 선전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들도 이에 대하여 무한한 고통과 불편을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과 언어, 풍속, 습관이 같지 않은 관계로, 우리들이 행하는 선전공작은 우리들이 기대하는 바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한 현재 관내에 있는 한국혁명청년들은 선전공작에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릇 현재 우방에 있는 한국혁명단체와 행동부대가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1. 자신의 민중이 없고, 단체를 확대할 역량이 없습니다.
 2. 적당한 공작이 없어서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의 후방에 머물면서 억지로 현상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혁명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우리들의 역량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사상 버리고 단결하여 무장부대 만들어야 한다’

 적후공작과 선전공작의 문제점을 지적한 나월환은 주의와 사상을 버리고 단결하여 무장부대를 만들 것을 강조하면서 화북지역과 화중, 상해와 남경일대를 공작기구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항전이 시작된지 벌서 3년여가 지났다. 우리들은 이 장기항전의 용광로에 들어가,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여 일면으로 현재의 내외의 정세는 우리들이 무장대오를 만들 것을 필요로 한다.

현재 우리 관내의 한국혁명운동자들은 반드시 결심하여, 주의, 사상의 경계선을 버리고, 한국민족 무장부대의 항일의 역량을 집중하여 모두 일치단결하여 신속히 무장부대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고 우리 한국민족의 영웅적인 용감한 투사들은 중국항전부대와 더불어 항전승리의 정도(征途)에서 용감히 매진하여야 한다.
 
이러한 무장부대에 참전하면 확실히 중국항전의 원조가 증강되고, 동시에 중국과 한국 양민족의 단결도 공고해 질 것이다. 오직 정성으로 단결하고 협력하여 항전하는 공동의 적인 일본파시스트 강도를 궤멸시키는 것만이 바로 이것이 중국과 한국 양민족의 진정한 갈 길인 것이다.‘

 1940년 5월 호종남이 제34集團軍  총사령이 된 후 훈련을 받는 대원들이 전방으로 파견되었고 한청반 훈련은 7월에 종료되었다. 그 후 9월과 10월에도 한청반 대원들이 전방으로 파견되었다.
 
5월에 파견된 공작대의 활동을 보면 이해평 등 공작대 1분대는 제34집단군 태행산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태행산 적후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태행산 어귀 능주(陵州)에 본대본부를 두고, 중앙군 제27군의 지원 아래 부대 본부는 김동수가 지키고, 김천성, 이해평은 일본군 제36사단 주둔지인 노안(潞安)으로, 김용주와 박영진은 신향방면을 각각 담당하기로 하였다.
 
김천성, 이해평 조의 활동을 보면, 그들은 범 장군의 소개로 장치현 망명정부와 접선하여 그들의 협력으로 김천성은 노안성안에서 찹살떡 가게를 차려놓고 한국출신 일본군들을 초모하였다.

그는 당시 일본군 군납을 가던 김형철을 포섭하였고, 그를 통해 일본군 제36사단 일본 통역관 이도순의 포섭에도 성공하였다. 또한 이도순의 협조로 김선성, 이해평 조는 한국청년 60여명을 포섭하여 5-6차례로 나누어 서안 본부로 호송하기도 하였다.
 
신향으로 가기로 했던, 김용주, 박영진 조는 계획을 변경하여, 김용주만 태행산 동쪽 하남성에 잠입하여 활동하였고, 박영진은 김동수 이월봉, 이삼녀 등과 함께 공작대에 포섭된 동지들을 서안본부로 후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한편, 서안본부의 박기성, 박동운, 賈子厚 등도 태행산까지 와서 초모한 인원의 후송작전을 지원하였다. 이와같이 훈련받은 한청반은 1942년 10월까지 3기가 배출되었으며, 그 인원수만도 90여명에 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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