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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 ⑤중국군 헌병사령부 조교로 임명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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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승인 2008.01.1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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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나월환은 1935년 초에 중국헌병사령부에서 복무하게 된다. 그의 나이가 22살 12개월 1일 되는 날, 대략 1935년 1월 15일(음력)에 헌병사령부 훈련소 견습(見習)으로 소위에 임관되어 그해 6월 중순에 조교(助敎)로 임명되며, 1937년 초에 중위로 승진하였다.

 1936년 늦은 봄 나월환의 친형 나일환씨가 사업차 중국에 들러 머나먼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동생을 찾아왔다. 남경(南京)에서 오랜만에 상봉한 형제는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며칠 뒤 일환씨가 귀국길에 오르게 되자 나월환은 상해부두까지 나와 형을 배웅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대 검속에 걸려 체포되었다.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하는 과정에서 나월환은 1920년대말 일본에서 중국으로 건너 가 항일투쟁을 했다는 것이 판명됨에 따라 며칠에 걸쳐 고문을 당해야 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월환은 항일투쟁의 정당성을 떳떳이 강변하였다. 취조를 마친 영사관에서는 나월환을 일본 본국으로 압송하기로 결정하고 상해에서 배편으로 출발, 청도항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나월환은 청도항에서 출발하려고 할 때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속인 뒤 곧바로 바다로 뛰어내렸다. 청도항에 정박한 배들 사이로 이배, 저배로 숨어가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월환은 곧바로 청도시장을 찾아갔다.

“중국군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월환입니다. 일본군에게 잡혀 일본으로 압송하고 있는 중에 배에서 탈출하였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중국군에서 복무하신 분을 왜 일본으로 압송하는 것입니까?”
“사실 수년째 한국 독립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군이며 한국독립투사로 지금 일본군에게 쫒기는 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도움을 청하여 청도시장은 중국과 한국이 같은 처지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무사히 남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중국군에 다시 돌아와 몸담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이후 중국본토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중국정부의 지원하에 일본과의 효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로 단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상해에서 활동했던 지하공작조인 김인, 이하유, 김동수 등은 광주에서 그들의 거취문제를 놓고 고민하였다. 임시정부를 따라 후방인 중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방으로 가서 활동할 것인가가 그들의 당면과제였다.

결국 논의 끝에 이하유, 김인, 김동수 등은 다른 동지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전방으로 가 활동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결심은 일본이 광주를 점령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임시정부를 따라 하는 수 없이 후방인 중경으로 이동한 그들은 다시 전시공작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군 헌병사령부에서 복무하고 있던 나월환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접촉은 기본적으로 이하유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하유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하유는 당시 동지들이 적극적으로 따르던 인물로 나월환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무정부주의를 전개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인물로 나월화 잘 아는 사이였다.
 
나월환과 의기 상통한 이하유는 나월환과 함께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 박기성에게 무정부주의자들이 뭉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자고 제안한다. 박기성은 자신의 회고록 『나의 조국』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이때 자주 만난 분으로는 유자명씨였다. 그때 내가 유자명씨더러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해 이야기하자 유자명씨는 묵묵부답이었다. 뒤에 나월환과 이하유와 연락이 되어 그들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나월환은 중국군관학교 제8기생으로서 중국군 소좌인가로 복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는 나월환이 나에게 말하기를,“우리끼리 우리나라 일을 해보도록 하자.”고 종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쉽게 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나월환과 이하유가 끈덕지게 나를 찾아와서 같이 우리나라의 일을 하자고 종용하여 하는 수 없이 나도 찬성하였다.
 
어느 날 이 말을 유자명에게 했더니 그의 말이 “그 불덩이들만 모여 있는데 자네가 끼게 되니 내 마음이 놓이네. 잘 부탁하네.”하는 것이었다.
내가 언젠가 유자명씨에게 얘기했을 때는 묵묵부답이었더니 어떻게 되어 그때는 찬성하는지 그의 의중이 의문스럽게도 했었다.
아무튼 나는 곧 중국군대에서 사표를 내고 전시공작대를 만들어 갔다“

 나월환과 이하유가 중국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박기성을 설득하여 전지공작대를 조직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끼리’라는 말은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상해에서 지하공작을 전개했던 옛 동지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은 일본유학시절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연맹에서 함께 활동한 바 있었고, 중국으로 건너온 이후에는 1931년 상해에서 중국관내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인 정화함, 유자명, 이달, 이강훈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명을 조직하여 활동했던 인물들이었다.
 
박기성은 아마도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자명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자 하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유자명은 김구계열의 인사들이 있는 전지공작대의 참여를 거절한 것으로 보이며, 더불어 젊은 아나키스트인 나월환, 이하유 등을 ‘불덩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그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각기 흩어져 활동하던 이들이 1939년 기강과 중경에 다시 모이게 되면서 자기들끼리 독자적인 활동방안을 모색하였고, 그것이 전지공작대 조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 계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조직

 박기성을 끌어들인 나월환과 이하유는 김구의 지원을 받아 장개석의 승인하에 1939년 10월 중경에서 30여명이 중심이 되어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한달 후 중국군 장개석 휘하의 호종남 제10전구사령관의 지원을 기대하면서 서안 이부가 29호에 자리를 잡았다.

아쉽게도 전지공작대 본부 자리의 원형은 없어졌지만 현재 중국 중급인민법원이 들어서 있다. 무정부주의자들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서안은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서안은 중일전쟁의 최전선인 화북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초모(招募)공작에 주력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전지공작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허락과 김구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결성된 단체였다. 김구의 장남인 김인이 공작대에 참여하고, 김구가 파견한 지하공작인 이하유, 김동수, 김인 등이 중심이 되었던 점 등을 통하여 김구와 밀접한 관련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하지만 임시정부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조직체였던 것 같다.
 
전지공작대가 임시정부와 관계없는 독자적 조직체라는 것은 중국 측의 보고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40년 7월 31일자로 왕영생(汪榮生)이 주가화(朱家?)에게 또 주가화가 하응흠(何應欽)에세 보낸 공함에 ‘전지공작대 대원들은 대부분 한국국민당에 소속된 사람들이었으나, 간부 인사들과 의견이 달라 마침내 관계를 끊고 단독으로 발전하였다’라는 요지의 내용으로 보고되고 있다.
 
결국 전지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 나월환과 이하유, 박기성 등이 독자적으로 조직한 군사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좌익세력의 조선의용대와 우익세력의 광복군과 더불어 무정부주의 세력의 군사조직이 전지공작대였던 셈이다. 전지공작대가 지닌 이러한 성격 탓에 조선의용대와 임정의 광복군 측에서 전지공작대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경쟁이 전개되었던 것 같다.  
 
나월환, 이하유, 박기성, 김동수, 김인 등 30여명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지공작대의 구성원들은 조국을 떠나 일본,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1940년 6월에 발간한 『한국청년』(제1권 제1기)에 전지공작대의 결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이 단체를 조성하기 이전 우리들 30여 명의 생활환경은 모두 같지 않으나 여러 해 조국을 떠나 일본과 중국에서 표류하며 학문과 혁명공작에 종사하였다. 우리들의 대장과 별외의 여러 동지는 10년전에 중국에 와서 중앙군교에서 군정을 학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 각 군사기관에서 다년간 복무하였다. 또한 일부분은 1년 내내 상해와 동부 등지에서 몰래 혁명운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초 각처에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중화민국의 해방과 조국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전지공작대의 주요간부는 대장에 나월환, 부대장 김동수, 정치조장 이하유, 군사조장 박기성, 선전조장 이해평 등이었다. 그밖에 대원으로서 김인, 엄익근, 김원영, 현이평, 조시제 등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설명: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가 있던 이부가 29호에 현재 중급인민법원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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