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리면서 계속 쏟아지는 비가 원망스럽다. 무엇보다 배를 댈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바다는 흰빛을 띠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이름은 모르지만 큰 섬에 도착했다. 병풍을 두른 듯 길게 이어진 섬은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자라고 있는 소나무도 조선의 여느 섬처럼 달라 보이지 않는다.
 
김율(金栗)이 멀리 바다를 바라보더니 소리쳤다.
 
“배가 보인다. 중선(中船)배다.”
 
수정호 크기만 한 배가 두 척이나 보였다. 각각 작은 거룻배를 꽁무니에 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배는 수정호를 목표로 점점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다른 배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맺힌 고가 풀린 듯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의 얼굴에 회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정보와 김중이 최부 앞에 나타나 무릎을 꿇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경차관님! 매사에는 항상 지켜야할 법도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영원불변하는 도(道)가 있고 땅에는 변치 않을 원리가 있습니다. 군자에게도 영원불변하는 몸가짐이 있는데 오늘만큼은 잠시 임기응변으로 상복을 벗으시고 권도로서 사모와 단령을 착용하시어 당당한 조선관인(官人)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으신다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를 해적이라고 떠벌리며 모욕을 가하고 폭력을 휘두를 것이 뻔해 보입니다.”
 
그들의 판단은 정확했다. 다가오는 배를 당당하게 막아내지 못한다면 모욕적인 욕을 당할 것이란 불문가지요,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최부의 대답은 차갑지만 이성적이고 줏대가 분명했다.
 
“바다에서 난파당해 허리까지 차고 넘치는 물 속에서 죽을 고생을 한 것이나 여러 차례의 위험한 고비를 겨우 넘긴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네. 이 섬에 닿아 물을 구한 것도 다가서는 저 배를 만난 것도 다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이치란 올곧고 바른 것이니 어찌 함부로 속이고 본심을 거짓으로 내보이는 행동을 해야겠는가?”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위기는 위기로 정면으로 쳐다보며 넘겨야 했다. 잠시 후에 정체 모를 두 척의 배가 다가와 접근해 오더니 수정호와 마주하게 되었다. 배에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이십여 명씩 타고 있었다.

그들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수정호를 살피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검은 솜바지를 입고 두툼한 짚신을 신고 있었다. 추운 겨울바다에서도 충분히 버틸 만큼 두툼하게 차려입은 격이다.
 
손과 머리에 붉은 헝겊으로 질끈 동여맨 자들도 있었다. 대나무 잎으로 가벼운 갓을 만들어 쓴 사람도 있고 질긴 나무껍질을 벗겨 얇게 해서 만든 도롱이를 치마처럼 펄렁이며 입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시끄럽고 떠드는 말투로 보아 한어(漢語)였다. 그들이 떠들어대며 싸우듯 말하는 투로 보아 중국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었다.

서(書) 문답으로 의사소통을 해 보지만

  그들이 떠들면서 큰 소리로 하는 말은 소리가 높아 싸움질하는 다툼처럼 들렸다. 초랭이 같은 모자며 길게 늘어뜨린 수염으로 봐서 그들은 틀림없이 중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최부는 정보와 김중, 이정, 손효자를 시켜 지필묵을 준비하도록 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글로 써서 통해볼 생각이었다.

이들 네 사람은 제주에서 경차관으로 있을 때부터 글 솜씨가 뛰어나 문서를 장리하고 경필하는데 함께 해온 자들이다.
 
이들은 전라도 관찰사에서 특별히 추천 받아 나주에서부터 함께 행동해온 자들로 최부를 믿고 잘 따르는 자들이기에 신임이 두터운 자들이기도 하다.
 
먼저 정보를 시켜 편지를 써 보냈다.
 
“조선의 신하 최부는 왕명을 받들고 제주에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가려고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난파당하여 표류를 계속하다가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느 나라 땅입니까?”
 
한지에 쓴 서찰을 읽어본 후 중국 배에서 회답이 왔다. 그들도 역시 종이에 적은 한자 글로 말해왔다.
 
“여기는 대 당국(大 唐國) 절강 영파부 지방인데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먼저 대당에 도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나라라니요. 명(明)나라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현재의 명나라를 우리들은 흔히 당이라고 부른답니다.”

 정보는 손으로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니 물을 마시고 싶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세계 만국공통어인 바디 렝귀지인 샘이다. 중국 배에서 얼른 알아차리고 물이 가득 찬 통을 두개나 가져다주었다. 처음 본 외국배에 배 푼 과분한 친절이다.
 
그들은 노를 저어 동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정호도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수 없었다. 식수를 얻었으니 부자 된 느낌으로 여유 있게 운항을 계속했다.

반나절쯤 지나자 최부는 선원들을 시켜 배를 가까운 섬에 대도록 했다. 섬의 이름은 모르지만 이곳이 중국 땅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설마하니 죽이기야 하겠는가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자 어디서 왔는지 거룻배를 매단 배가 수정호로 다가왔다. 처음에 식수를 얻었던 배보다 조금 더 커 보였다.

그 배에는 무장을 하고 알록달록하게 치장을 한 군인들이 십여 명 타고 있었다. 기다란 창을 반듯하게 꽂고 서있는 폼이 대견해 보였다. 선원들이 입고 있는 옷차림과 말투가 앞서 만났던 사람들과 같았다. 그들이 먼저 물어왔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요?”
 
이번에도 전과 똑같이 정보를 시켜 조선 사람이라고 쓴 글을 들어 보였다. 최부가 물었다.

“여기는 어느 나라 땅입니까?”

-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