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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 이야기 20- 이영견흉년들어 아이를 길거리에 내다버려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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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승인 2006.04.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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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 즉위년인 1470년. 농사철에 비가 내리지 않아 극심한 흉년이 들자 성종은 "흉년을 대비해 구제할 먹을 만한 물건을 미리 많이 준비하라"고 8도 관찰사에게 지시하였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였는데, 비가 흡족하지 못하여 경작할 시기를 이미 놓쳤고 김매는 일도 할 수 없으며 추수할 희망이 이미 허물어졌다. 흉년을 구제할 모든 일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행할 조건을 뒤에 갖추어 기록하니, 8도 관찰사는 그것을 자세히 알아서 조치하라"
 
흉년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극심해지자 성종은 임기가 찬 관찰사와 수령들을 교체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구황(救荒)에 힘쓰라고 전교하기에 이른다. 흉년으로 말미암아 1471년까지 전라도와 경상도에 굶주려 죽거나 부종(浮腫)이 생겨 사망자가 속출하고 심지어는 여러 고을에서 아이를 내다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흉년이 들던 해 이영견은 나주목사로 도임하기 위해 주(州), 현(顯)을 지나면서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주목사로 부임하자 그는 곧바로 성종에게 자신이 도임하면서 목격한 처참한 광경을 상소한다.

"제가 지나간 주, 현에서 굶주려 죽은 자나, 부종이 생긴 자, 그리고 아이를 내버린 자가 여러 고을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성종은 곧바로 전라도 진휼사(賑恤使) 이극배를 불러 그 실상을 파악하라고 유시(諭示)한다.

"나주목사 이영견이 지나가지 못한 곳 또한 반드시 그와 같을 줄로 안다. 그러나 관찰사가 이를 아뢰지 아니하니, 그것을 알고 있는가? 알지 못하여 아뢰지 아니하는가? 만약 김영견이 아니었다면 끝내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백성들이 굶주림 때문에 아이들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있는데도 관찰사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가 이영견이 보고함에 따라 백성들의 굶주림의 실상이 어느 정도 파악되었다.
화가 난 성종은 구황을 소홀히 하는 수령에 대해서는 공신(功臣)이던, 의친(議親), 또는 당상관(堂上官)을 불문하고 장(杖) 80대를 때리고 그대로 근무하도록 진휼사 이극배에게 지시한다.

나주목사 도임하다 굶주림에 처한 백성 발견

이영견의 상소내용에 따라 실상을 파악한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광주, 장성에서 아이를 내버린 것은 그것이 본 고을 사람들이 내버린 것인지, 다른 고을 사람들이 내버린 것인지를 반드시 가려내야만 죄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을 굶주려 죽게 하거나 부종을 나게 만든 나주판관과 영암군수, 능성, 구례, 강진, 해남, 무안, 남평, 진원현감에게는 모두 장 80대를 때리고 나주목사와 장흥부사, 보성군수는 각각 1자급(資級)을 강등시키소서. 백성들로 하여금 아이를 내버리게 한 광주목사와 광주판관, 장성현감은 장 60대를 때리도록 시행하게 하소서."

이영견은 자신의 상소로 말미암아 그 또한 한 등급의 품계(品階)가 강등됐으며, 아이가 내버려진 광주목사와 판관, 장성현감에게는 장 60대에 처해졌다. 나주판관과 영암군수 등 도내 현감들에게는 백성들을 굶주리게 했다는 죄목으로 광주목사나 장성현감보다 장 20대를 더 맞았다. 그러나 이영견은 다음해 구황하는데 앞장서 판관 조훈과 함께 복원됐다.
이영견은 나주목사로 내려오기 25년 전 병조정랑으로 연분답험(年分踏驗: 세금을 매기기 위하여 실제로 생산현장을 조사함)차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그가 나주목사로 내려올 때 69세의 많은 나이였으며, 73세까지 4년 동안 나주목사로 일했다. 재직하는 동안 기근이 들어 정부의 금지책에도 불구하고 장문(場門)이라는 시장이 개설되자 수령으로서 금지 않았다 하여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신광재 기자

장문(場門)

 조선시대 지방에서 열린 장시(場市). ‘향시(鄕市)’라고도 한다. 장시는 관부(官府)에서 설치한 공랑상점(公廊商店)이 아닌 아무 설비 없는 일정한 장소 또는 가로(街路)에서 일정한 날짜에 다수의 상인들과 부근 주민들이 모여 물자를 교환한 곳을 말한다.
 

서울에서 열리는 장시와 구분하기 위해 지방에서 열리는 장시를 장문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농본주의(農本主義)를 국시(國是)로 하고, 농민을 토지에 묶어 두고자 했다. 그런데 지방의 상거래를 내버려두면 일반 농민들의 토지 예속이 점차 약화될 것을 염려해 지방 상거래를 억압하였다.

그리하여 장시가 등장한 15세기 경뿐만 아니라 17, 18세기에 이르는 숙종 연간까지도 장문 금압정책을 뚜렷이 내세운 일도 있었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어, 장시의 개설을 인정하는 대신 거기에서 장세(場稅)를 걷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장문의 수는 점차 늘어났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순조 때는 경기도 102개, 충청도 157개, 강원도 68개, 황해도 82개, 전라도 214개, 경상도 276개, 평안도 134개, 함경도 28개 등 1,000여 개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장문에는 5일시·10일시·15일시·연시(年市) 등이 있었고, 5일시가 주종을 이뤘다. 5일시는 일월육장(一月六場)으로 한 지방에서 매월 6회씩 열렸다. 이는 자급자족을 본체로 하는 지방 농촌에서 지방 주민들의 생산품 판매 및 일상생활용품의 수급 관계상, 5일 만에 한 번씩 장이 열리는 것이 실정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각 장의 개시일은 점철하며 떠도는 보부상(褓負商)들이 시장을 도는 데 좋도록 각 장이 서로 다른 날짜를 골라 정했다. 이들 인접한 장문들은 대개 30∼40리의 거리를 표준으로 망(網)을 이뤘다. 장문에서는 주로 곡물·소채·약재·질그릇·도기·가축·농기구 등이 거래되었다.

 참고문헌  : 太宗實錄, 定宗實錄, 萬機要覽, 朝鮮の 市場(文定昌, 1941), 韓國近代經濟史硏究(劉元東, 一志社, 1977), 16세기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李景植, 韓國史硏究 57, 1987), 冊街市場圈의 變化(崔晟基, 安東文化 8, 1987), 18·19세기 地方 場市에 대한 一考察(金大吉, 又仁金龍德敎授停年紀念史學論叢,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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