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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집과 건물들로 하드웨어뿐이다. 전시실이 속히 완공되어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소프트웨어는 구경할 수
없었다. 묵죽도도 철재 자물쇠에 갇혀 있어서 멀게만 보인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동상은 광주 어린이대공원에 자리했다. 길게 늘어뜨린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서 위엄이 넘치고 머리는 두건을 둘러썼다. 무릎 위의 두 손은 편안하게 올렸지만 기운이 서리고 가죽신발을 신고 앉은 자세의 선생은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이다. 끈으로 질끈 동여맨 허리와 기다란 옷고름이 추상같은 조선선비의 모습이다. 움푹 들어간 두 눈과 오똑한 코가 긴장감으로
주변을 압도한다.
선생이 지은 시는 1천600여수가 전해오는데 경서를 바탕으로 경구와 고사를 많이 이용한 청아한 도학자로 한 치의 흩어짐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온 인품이 묻어있는 주옥같은 것들이다. 오늘날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는 그의 작품들은 자연을 사랑한 그가 아니면 아무도 토해낼 수 없는
명시들이다. 국문학적으로 선생의 시는 면앙정(송순) 가단에서, 성산(정철)가단으로 이어지는 다리와 같은 중간적 역할을 해오며 국문학이 새장을
열며 발전해 오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인후 선생의 묘 자리는 필암서원에서 들판을 지나 맥동 부락의 입구에 있었다. 선생의 신도비는 길옆이라 찾기가 쉬웠다. 묘역의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생애와 행정을 소상하게 기록한 비로 비신위에는 작은 돌이 몇 개쯤 올려져 있었다. 비문은 당시의 실력자였던 송시열이 지었다고 한다.
동국 18현의 반열에 오른 선생은 학자로서 도학과 절의를 손수 지키고 문장을 갖춘 그의 생애와 자취를 적었는데 기록사료로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역사적, 학술적, 향토사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신도비를 중심으로 선생의 묘 자리까지 가는 길은 배수구를 만들고 길을 다듬었다. 습지여서 물길을 만든 것이다. 윤씨 부인과 나란히 자리한
묘비명이 단아하다.
‘문정공 하서 김선생지묘’(文政公 河西 金先生之墓).
석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말과 선비 상, 석주가 단정하게 서있고 둥근 석봉이
4개가 박혀 있어서 행사 때 쓰일 차일을 묶는 자리다. 여기서도 문필봉을 향한 묘는 앞을 흐르는 개울 물이 넉넉하다. 당장에라도 먹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뾰쪽한 붓끝이 기가 살아 팽팽하다. 하서공과 문필봉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나보다. 필암서원에서 보았던 문필봉보다
더 가깝게 또렷이 보이는 문필봉이 선생을 상징한다.
전시실 속히 갖춰져야
신도비 앞으로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황룡강으로 흘러가는 물길과는 반대방향으로 수구처리를 했다. 두개의 물줄기가 서로 크로스하며 흐르게
했다. 길지중의 길지를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조건에 맞게 가꾸어 간 것이라 하겠다. 왼편의 래용(來龍)도 길게 뻗어 강가까지 이어졌다.
아깝지만 우백호 자리가 조금은 허하다. 그러나 그곳에도 어김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적송을 심고 대밭을 만들었다. 짧은 기를 보충한
것이다. 선인들의 자연을 보는 시선이 정곡을 찌른다. 묘지 아래쪽으로 습한 자리는 나무를 베어내고 잔디를 가꾸어 양토로 지켜낸 점은 아무리
칭찬해도 아깝지 않다. 오늘날까지 선생의 집안이 영산강을 지켜온 명문가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점이 시원하게 풀리는 순간이다.
풍수지리에서 서출 동류수(西出 東流水)를 제일로 친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서출 동류수에 역으로 부딪치는 물길까지 겹장으로 흐르니 이보다
더한 명당은 없다. 바다에서도 한류와 난류가 부디 치는 곳에는 많은 프랑크톤이 모이고 아울러 수많은 어종의 고기들이 잡히는 황금어장이 되는데
이곳의 형세가 그렇다. 멀리 보이는 안산 뒤쪽의 잔잔한 조산이 적당한 높이로 길게 연결되어 부드럽고 편안하게 조망된다. 문필봉과 함께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리라는 기대감이 가슴을 부풀게 한다.
길고 멀리 보이는 잔잔한 산들은 사람들의 성격까지도 차분하게 다듬어 가라앉혀 줄 것이다. 이곳에서 쳐다볼 때 정면으로 보이는 산이라서 보지
않으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매일 쳐다보게 된다. 사람이 365일 날마다 계속해서 산을 쳐다보게 되면 무의식적인 상태에서라도 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전이되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안면이 중요하다. 현무를 받쳐주는 키 큰 적송이 필요하고 충분하게 북쪽을
지키고 있었다. 흘러가는 황룡강물 따라 광주로 향했다.
/나주 중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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