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연재 | 신광재 기자의 근·현대 나주인물사
1. 한국광복군 주력부대 제5지대 지대장 나월환 ①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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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호] 승인 2007.11.2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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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일전쟁 이후 임정의 외교노선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물론, 내부적으로도 점차 무장독립투쟁론이 우세해져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 창군식이 열렸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1907년 8월 1일 강제 해산당하고 33년 만에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한제국 국군의 맥락을 계승하게 되었다.
 
9월 17일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총사령부만으로 이루어졌다. 병력이 확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우선 총사령부부터 조직한 것이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를 기초하여 전위부대, 즉 지대를 편성해 나가는 소위 하향식 편제방식에 의해 군대로서의 편제를 갖추어갔다.

   
▲ 80년 전에 지어진 고택, 나월환의 아버지로부터 매수한 최용호씨의 할아버지가 80년 전에 나월환의 집터에 고택을 지었다.
총사령부에서는 원래 제1, 제2, 제3지대만을 편성했던 것 같다. 총사령부의 기본목표는 3개 사단(師團)을 편성하는 것이었고, 총사령부와 군사특파단 인원들로 3개 지대를 편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41년 1월 1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제5지대가 됨으로써 모두 4개 지대가 편성되었다.
 
제5지대로 편입된 한국청년전진공작대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939년 11월 중경에서 조직한 군사조직이다. 전지공작대의 결성은 김구의 승인하에 이루어졌다. 전지공작대 결성과정에서 김구의 승인을 받았지만 임시정부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는 독자적인 조직체였다.

전지공작대는 청년공작대에서 활동하던 대원들의 주도하에 조직되었다는 점에서 일견 청년공작대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과 이에 따른 제5지대의 편성은 창설 초기 광복군이 거둔 가장 대표적인 성과의 하나였다.
 
1940년 5월부터 전지공작대는 서안인근에서 招募공작을 전개하기 시작해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같이 전지공작대가 적후방에서 초모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무렵, 임정에 의해 광복군이 창설되고 그 총사령부가 서안으로 이전해 온 것이다.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은 임정과 조선의용대 측으로부터 동시에 포섭공작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편입과정에 대해서 알려지지 않지만 임정의 내밀한 포섭공작이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서안에 설치된 광복군사령부가 나름대로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1940년 말에 이르면 전지공작대는 광복군 편입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1941년 1월 1일 광복군으로 편입하였다. 신년 團拜式이 끝난 후 서안시 이부어에 있는 전지공작대 본부의 대례당에서 제5지대 성립식을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전지공작대 대장 나월환은 ‘한국광복군 명령에 절대복종한다’는 취지의 선서를 하였다.
 
1백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던 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으로써, 30여 명으로 출발한 광복군의 병력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5지대가 성립됨으로써, 광복군은 창설 초기 단위부대로 4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
 
왕곡면 신포리에서 나종성의 4남 3녀 막내로 태어나

 나월환(羅月煥)은 1912년 음력 2월 13일 왕곡면 신포리에서 나종성의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농(富農)은 아니었지만 그의 집은 논 20-30마지기를 경작하고 집 뒤에 죽전 12마지기를 소유한 그런대로 먹고살만하였다.
 
나월환이 태어난 그해 지독한 가뭄이 들어 모를 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가 태어난 날 저녁 기다리던 단비가 내려 겹경사 터졌다. 다음날, 평소 농사일에 무관심했던 그의 아버지가 논에 들어가 장구를 치며 모를 심고 있는 인부들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어머니(나월환의 큰 누나 나월례)에게 들은 이야기야. 그해 비가 안 내려 모를 못 심고 있었는데, 나 장군이 태어난 날 저녁 비가 쏟아졌어. 논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그 양반이 매우 기쁜 나머지 논에 들어가 북장구를 치면서 인부들의 기분을 맞춰주었다고 그래. 아들을 본데다 기다리던 비가 내려 즐거워서 논 가운데에서 장구를 치면서 흥겹게 놀았대.“(이동흠, 1932년생, 이창동 진포리, 나월환의 조카)

 그가 태어나기 전 송월동 흥룡(興龍)마을에서 살았던 그의 가족은 1900년을 전후로 왕곡면 신포리로 이사와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순간 놀음판에 뛰어들어 신포리 집과 집 뒤편의 대나무밭 12마지기를 날려버렸다. 신포리 집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영철씨 아버지에게 팔고 그의 가족은 옆 마을인 송죽리로 이사를 해야 했다.
 
지금은 최씨의 손자 용호씨가 나월환의 집터에 살고 있는데, 최근 2,000평이 넘는 대나무밭을 모두 없애버리고 그곳에 나무를 심어 놓았다. 최씨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1920년 전후로 이사와 집을 지었다고 해 나월환 가족이 1920년 전후로 신포리에서 송죽리로 이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죽(松竹)이라는 호(號)는 그가 어렸을 때 이사 온 송죽리(松竹里)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을 뒤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송죽리라고 마을 명칭이 지어졌는데, 지금도 소나무와 대나무가 마을 뒤편에 빽빽이 심어져 있다.      

웅변에 천재적인 소질 가진 야무진 소년

 유년시절 나월환은 어떤 아이였을까?

동네 애들과 소꿉장난을 할 때마다 말주변이 뛰어나 그는 항상 앞에 나와 일장 연설을 하는 아이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웅변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일이다.
 
동경시내에서 소년웅변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에 나월환이 연사로 참가하게 되었다. 이 웅변대회에 각계각층에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참관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친위대장인 전대균(錢大鈞)이 공무로 동경에 왔다 이 웅변대회에 참관하게 되었다.
 
전 대장은 연사들의 연설을 경청하던 중 나월환 소년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듣고 장래에 큰 인재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된다. 나월환을 중국으로 데려가 공부시켜야겠다는 결심을 한 전 대장은 나월환을 설득시켜 중국으로 그를 데려가게 되었다.
 
웅변에 천재적인 소질을 지닌 데다 고집이 셌던 그는 자존심이 강하여 자신이 세운 원칙을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외골수였다. 강직한 성격은 그의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나월환이 어렸을 때 일이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져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송죽리에 간혹 항일의병이 들어와 며칠 지내다 가곤 하였는데, 이 정보가 일본 왜경에게 전해졌다. 왜경은 호구조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에 들어와 의병들이 숨을 만한 곳을 수색하면서 횡포를 부렸다. 나월환의 집에도 들이닥쳐 창고며 집 곳곳을 수색하였다.
 
이 광경을 마루에서 긴 담뱃대를 물고 지켜보던 나월환의 아버지 나종성씨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일본 왜경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의병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던 왜경에게 나씨의 불친절한 행동은 불에 기름을 얹은 격이었다. 곧바로 일본 왜경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건방진 놈, 저놈을 마당에 눕혀라!”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잘못했다”고 빌기보다는 오히려 왜경에게 더 떳떳하게 대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왜경의 발길질은 거세졌다. 마당에서 왜경들에게 몰매를 맞은 그는 한 달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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