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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철웅 국장 |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순식간에 물러나고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열대야도 어느 순간 물러났다. 거짓말처럼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열어 놓은 문으로 수줍게 들어오는 바람이 가을이 깊어 가고 있음을 알린다. 길에는 낙엽이 흩날리고 그렇게도 떠나기 싫어 발버둥 치던 여름도 계절의 순환은 어쩔 수 없었던지 꼬리를 내렸다.
무엇보다 계절의 변화는 곤충들의 울음소리로 감지 된다. 목이 찢어지듯 요란하던 매미의 울음소리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밤이면 가을의 전령 귀뚜라미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이 미물들이 어찌 계절의 변화를 기억하는지 신기하다. 낙엽 뒹구는 소리와 함께 서늘해지는 가을이 되면 유독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고은의 시에 얼마 전 작고한 ‘뒷것’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 편지’다. 편지가 사라진 시대, 편지를 소재로 한 노래는 여전히 넘쳐나지만, ‘가을 편지’는 어딘지 모르게 가을과 궁합이 잘 맞는 노래인 듯 싶다.
‘가을 편지’ 가사는 시인 고은과 인연이 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이 고은에게 요청해 고은이 즉석에서 써준 시다. 이후 이 시는 김민기에게 작곡이 맡겨졌고, 1971년 최양숙의 음반에 수록되었다. 김민기는 20여 년 뒤인 1993년 이를 새로 녹음하여 자신의 음반에 싣는다.
여느 가을 노래보다 가을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잘 표현된 ‘가을 편지’는 이동원, 최백호 등 여러 가수가 불렀지만, 김민기가 자신의 음반에 실은 1993년 판이 꾸밈이 없고 깊은 울림을 주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순전히 내 개인 취향이지만 ‘가을 편지’는 김민기가 압권이다. 외로움을 느끼며 사랑을 원하는 가을 타는 남자의 마음을 담담하게 잘 풀어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모든 것을 헤메인 마음 보내 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가을 편지’는 살랑거리는 가을바람 속에서 불러야 제맛이 난다. 이 노래는 곡도 좋지만, 노랫말이 참 아름답다. 글로만 옮겨 놓아도 김민기의 낮고 촉촉한 목소리가 가을의 선선한 바람처럼 다가올 것만 같다.
가을 하면 지금도 편지가 떠오르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인지, 아님 나이 들어 좀 묵은 정서인지 모르겠지만, 한때는 빨간 우체통만 봐도 설렜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의 행간을 서성이다 되읽곤 하던 서정적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하니 더더욱 그렇다.
해가 갈수록 손 편지가 줄어들고 아날로그적 소통 문화가 약해지는 것이 스마트폰이 ‘원죄’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 자신이 깜짝 놀란다. 조금 전까지 카톡을 하느라 바빴던 내 휴대폰의 온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에, 나 또한 스마트폰과 함께 ‘공동정범’이라는 생각에 쓴웃음.
동네 어귀에서 우체국 집배원이 편지를 갖고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오래돼서인지 이제는 낯설다. 그 시절 집배원 아저씨가 전해준 편지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손꼽아 기다리던 연애편지였을 때는 더욱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이 가을,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기다리며 몇 번이고 대문 밖을 서성이던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여 밤새워 편지지 앞뒤를 빼곡히 메워 쓰던 ‘연애편지’는 7080세대에게는 이성에 대한 유일한 ‘사랑 표현의 도구’였으며 ‘젊음의 낭만’이었다. 단풍과 낙엽이 뒹굴고 점점 옷깃이 여며지는 깊은 가을에는 더욱 그랬다.
편지가 점점 귀해지고 있다. 이메일로 대체된 지 오래다. 문자며 카카오톡에 페이스북까지 다양해진 SNS 시대 소통으로 공들여 쓰는 손 편지들이 사라지고 있다. 실제로 손 편지는 해마다 줄어 우체국이 취급한 연간 우편 물량은 대폭 감소했다고 한다. 우리 눈에 익숙했던 빨간 우체통은 이젠 빛바랜 사진 속의 추억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편지’라는 단어 앞에 ‘손’을 꼭 붙여서 말하고 있다. 문자와 이메일의 비중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생긴 현상인데, 그만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눌러 쓴 편지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단어 표현이 어찌 달라지든 손 편지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크고 낭만적이기까지 한다.
손 편지는 연인에게, 친구에게,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끊어지고 해석된 기억을 연속적이고 선명한 기록으로 넘겨줄 것이다. 하지만 우체통에 편지를 넣거나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가을은 풍요로움이 영그는 계절이지만, 그리움이 사무치는 계절이기도 하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면 우수에 젖어 그리움이 깊어진다. 그래서 김남조 시인은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라며 그의 시 <가을 햇볕에>에서 ‘그리운 너’를 하나씩 그리고 있다. 그리움이 참을 수 없는 애틋함으로 다가온다면 편지만 한 게 없다. 그것도 손으로 쓴 편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불통의 시대, 편지 쓰기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을 주는 선물이다. 진심과 정성으로 쓴 편지 한 통은 받는 사람에겐 그 어떤 값비싼 선물보다 더 가치가 높다. 워드로 친 깔끔한 인쇄체의 편지보다는 온 정성을 들여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쓴 사람의 숨결까지 느낄 수 있어 받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편지는 수신인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러운 문학”이라는 소설가 신경숙의 말처럼, 오롯이 수신인 한 사람만을 위해 집약된 사연과 정성, 사랑과 애씀의 모든 마음이 녹아 있는 글이다.
오늘만큼은 멜랑꼴리한 음악을 들으며 마음에 차분히 빗질을 하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가 되고 싶다. 지금은 이메일, 메신저, 카톡 등이 외면할 수 없는 통신 수단이지만, 이 가을에는 누군가로부터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정겨운 편지를 받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