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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읍성과 나주목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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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승인 2024.06.09  22: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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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순(전 나주시청 문화예술과장, 학예연구관)

나주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발전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수 없다. 백제 이전에 현재의 나주시를 중심으로 마한 54개국의 하나인 신운신국 등 몇 개의 국이 있었다고 비정하고 있으나, 고대음운의 변천을 가지고 비정하였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영산강유역 삼포강 주변 현재의 반남면일대에는 35세기에 축조된 대형옹관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어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토착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다시면 일대에도 많은 고분이 산재되어 있어 초동마을과 회진마을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주는 영산강을 배경으로 잘 발달 된 농경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백제시대 나주는 발라군 이었다. 그 치소가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나주읍내 지역이 아닌가 한다. 백제시대 이후로 통일신라 시대의 금성군 고려조선시대의 나주목으로 이어오면서 시대가 바뀌어도 치소(읍치)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치소는 취락의 기본조건을 기본으로 군·현 내의 정치·경제·사회적 조건이 고려되어 설정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 되기 때문에 물의 취수, 농경지, 적절한 주거공간, 교통의 편리 등과 함께 풍수지리적 관점에서도 합당해야 하는 등 이러한 조건들이 치소의 설정에 중요하게 작용했다. 치소와 사람이 모여 사는 지역에 대한 풍수를 도읍풍수라 한다. 이는 집단양기로 표현되며 대부분 산을 등진 평지에 잡고 뒷산을 진산(양기를 진호하는 산)이라 부른다.

또한 치소는 함부로 옮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비보(裨補)를 하여 이동이 용이하지 아니한 결함을 보충하기도 한다. 이런 흔적은 나주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다름 아닌 동점문밖 석당간(보물49)이라 부르는 석장(石檣 돌돛대)이다.

성안에는 목장(木檣 나무돛대)을 세워 행주형(行舟形)의 지형적 특성을 비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양·청주(銅檣전북 무주·충남의 공주지역 등이 대표적인 행주형 지형에 치소를 설치한 지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 고적조에 이 주를 설치할 때 술자(術者)가 이것을 세워 행주의 형세를 표시하였다. 문안에도 목장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려 초에 세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 나주목 치소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고려말 나주 거평부곡으로 귀양온 삼봉 정도전의 유부로서에서 나주목에 살고 있는 백성의 모습을 표현하기를 왜구들로 인해 고을이 합쳐지고 주군이 옮겨가서 사람이 없는데 나주는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라고 고려 말의 나주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려시대 나주목 치소는 현재의 나주읍내 였다. 당시의 나주목 읍내는 조선시대의 규모보다는 작았으며 나주목 운영에 필요한 중요건물들이 존재하였다. 1010년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나주로 몽진왔던 현종이 건넜다는 사마교(駟馬橋)와 주 서쪽 1리에 있는 법륜사(法輪寺)와 남쪽평지에 있는 금륜사(金輪寺) 북문 밖에는 대안사(大安寺) 등이 있었다.

고려 후기의 기록과 조선 초기의 자료들을 살펴보면 지금의 향교자리에는 파주염씨들이 살고 있었고 전한다. 나주천을 가로질러 학다리(鶴橋)가 있었고, 동점문 밖에는 석당간이 동문 안쪽에는 목당간이 있었다. 행정 치소의 물리적 토대인 나주읍성의 축성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최초로 문헌에 나오는 때는 1237(고종24) 고려사열전 김경손(金慶孫)전에서 확인된다.

또한 정도전의 글에서도 나주읍성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나주읍성은 1407(태종7) 성석린이 울린 읍성축조론을 보면 나주읍성은 보성과 함께 140410월에 석성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후 나주읍성은 문종 대에 이르러 규식에 맞지않고 읍내에 민호가 수가 많기 때문에 개축의 대상이 되었다.

나주읍성의 개축은 김계희 목사에 의해 완성되었다. 당시 김목사는 읍성의 개축뿐만 아니라 동점문의 중수를 비롯하여 나주향교까지 중수 하였다. 이렇게 읍성이 개축되자, 이후 나주읍성 내에는 각종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고 도시가 발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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