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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인연이 (2)
송용식 수필가  |  songys8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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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승인 2024.06.09  22: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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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용식 공학박사·건축기술사·수필가

운명 같은 만남이었을까. 모임이 있고 난 뒤 그 여자 동창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서로의 처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결혼식은 졸업 후에 하고 우선 함께 살기로 했다. 돈 한 푼 없는 학생 신분으로 무모한 일이었다. 허허벌판에서 서로 의지할 버팀목과 사랑을 가꿀 둥지가 절실해졌다. 누나들과 형님 집을 찾아다니며 둘이 잘살아 볼 테니 방 얻을 돈을 도와 달라고 했다. 도움은커녕 지 앞가림도 못하는 녀석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며 한바탕 소란만 만들었다. 친구의 도움과 그녀가 모아둔 돈으로 방 한 칸을 얻었다. 신혼 아닌 신혼살림을 시작한 것이다. 

고난은 다시 이어졌다. 대학을 야간으로 돌리고 새벽 두부 장사를 시작했다. 아내는 봉제공장 시다로 취직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도봉구 일대 골목길을 ‘두부 사려’를 외치고 다녔다. 젊은 학생이 두부 장사한다며 단골 아주머니들이 늘어가기도 했다. 야간 강의를 듣고 집에 오면 단칸방에 불이 꺼져 있었다. 봉제공장 시다 봉급은 쥐꼬리만 하고 허구한 날 야근에 툭하면 밤샘 작업이었다. 새벽 두부 장사를 나가야 하지만, 밤늦게 돌아오는 아내의 힘든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집에 있을 수 없었다. 조그만 공장 반지하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며 아내가 일 끝나기를 기다렸다. 보푸라기 먼지 속에 재봉틀을 돌리며 졸음과 싸우고 있을 아내. 이 기다림은 무엇인가. 아내는 무슨 생각으로 오늘을 버티고 있을까.
 
대학을 졸업하는 날, 형편이 조금 나은 넷째 누나가 축하해 주러 오셨다. 구두 티켓 한 장을 선물로 주셨다. 그날 밤 그 선물은 당신이 받아야 한다며 아내에게 주었다. 티켓을 현금으로 바꾸어 쌀을 샀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더란다. 쌀이 젖을까 봐 포대를 메고 뛰었단다. 헐떡이며 달리는 아내의 얼굴에 빗물 반 눈물 반이 흘렀을 것이다. 
 
어려울수록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생활했다. 돈 버는데도 눈치가 빨랐다. 다시 인연의 손을 내밀어 왔다. 유흥업 관련 일이었다. 일의 내용보다 우선 돈을 벌어야 했다.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가진 자의 향락 욕구를 충족해 주면 돈은 저절로 들어왔다. 몇 년을 돈 버는 재미로 살았다. 애들이 태어나고 조그만 집도 장만했다.
 
나날이 제자리를 잡아가며 평온을 찾아가는 줄 알았다. 뜻밖에도 아내가 지금 하는 일 그만두라는 것이었다. 장래성도 없어 보이고 나중에 애들이 크면 아빠로서 떳떳한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돈만 많이 벌어다 주면 지난 세월을 한풀이하듯 행복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내가 삶의 방향키를 바꾸어 버렸다.
 
대학 전공을 찾아 엔지니어링회사에 취업했다. 회사는 그의 됨됨이를 보고 영업 분야 일을 맡겼다. 전국의 관공서와 공기업, 건설회사를 상대로 하는 영업이었다. 붙임성 좋은 성격과 부지런함으로 성과가 쌓여갔다. 진주에 저녁 문상갔다 다시 속초로 가서 자고 있던 상주를 깨워 문상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영업맨들에게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규모가 큰 엔지니어링회사의 고위직까지 올랐다. 
 
아내는 시부모 얼굴도 모르는 막내며느리이다. 하지만 30년 넘게 시부모 제사를 모셨다. 언젠가 “힘들 테니 부모님 제사 그만 모시자.”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제사 모실 때마다 당신 좋아하는 모습 보고 모셨어. 미안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도 계속 모실 거니까.”라고 했다. 아내의 몸짓이 아끼고 존중해 주도록 만들었다.
 
여자는 알 듯하면서도 모르겠다. 아내는 변변한 배움도 없다. 밑바닥 생활만 경험했다. 돈이 사람대우해 준다는 세상의 이치를 모를 리 없다. 안정적인 수입원을 포기하게 하고, 남편이 좋아한다고 시부모 제사를 계속 모시겠단다. 어디서 터득했을까. 삶은 목표와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전쟁 같은 피치 못 할 사정으로 뿔뿔이 헤어지게 되면 여수 진남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아내와 두 아들 생일날에 금목걸이를 선물해 주고 있다. 만약 돈이 떨어질 때를 대비한 비상금 용도인 것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은 엉뚱한 발상이다. 궁핍하더라도 형과 누나들이 함께 살았던 여수의 유년 시절이 생각나서일까. 
 
그는 지나온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쩌면 속으로 울면서 자신 이야기를 자신에게 들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눈물을 훔쳐 가며 들었다. 
 
배롱나무는 휘어지고 틀어지면서도 애써 수형(樹形)을 잡아간다. 나무의 몸매는 매끈하고 귀티가 난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울음 우는 것 같다. 그는 배롱나무 같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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