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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나주이야기 - 18. 나주에 큰물이 닥치다.
김민주 기자  |  minjuk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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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호] 승인 2007.06.1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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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밖에 물이 부는 것을 읊음(觀漲南門外 有吟)

?迫懷襄勢 큰믈이 산을 싸고 언덕을 넘는 형세에 이르니
誰施大禹功 누가 위대한 우임금의 공적을 베풀 것 인가
魚龍?河內 물고기와 용이 강물 속에서 기뻐하며
出沒浪花中 물결이 이는 속을 나왔다 들어가네
河伯警旋目 하백이 놀라서 눈동자를 굴리고
馮夷不敢宮 풍이가 감히 집에 거처 못하네
俯觀人事上 사람의 일을 아래로 내려다보니
天意本來公 하늘의 뜻은 본디 공평하다네

 이 시는 선생이 언제 지은 것인지 모르지만 때는 대략 언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하백과 풍이는 수신(水神)의 이름입니다.

아마도 장마철 또는 태풍이 몰아쳐 오던 시기에 큰 수해를 입은 상황을 말하고 있다. 남문이라고 하면은 나주읍성의 남문 즉 남고문을 이르는 말인데 남고문 앞까지 물이 밀어 왔으니 얼마나 큰 재해를 입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임신년 2월 28일 크게 우박이 내리다(壬申二月二十八日 大雹)

天時人事兩相宜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 둘이 서로 맞으니
暘雨皆從造化施 햇빛과 비는 모두 조화를 따라 베풀어지네
庭畔祗隣梅瘦? 뜰 가에서 그저 매화의 마른 꽃 떨기와 이웃하는데
一番悲雹盡空枝 한 바탕의 슬픈 우박이 가지를 텅텅 비우네

終日大風時雹雨 종일 큰바람에 때로 우박이 내리니
滿園花事盡?傷 정원 가득한 꽃들은 모두 꺾이고 상했네
竹里老翁無所識 죽리의 노옹은 아는 바가 없는지
正冠寒?靜焚香 갓 단정히 쓰고 차가운 온돌에서 조용히 향피우네

 이 시는 선생이 64세 때에 쓰신 것이다. 이 해 1월에 선생은 장모 상을 당하였다. 이시에서  우박이 내리는 밖의 세상과는 별개로 단정히 갓 쓰고 선정에 드신 노옹은 선생 본인이 아닌가 합니다.

이 시에서 느껴지는 한가지는 1월에 장모 상을 당한 아픈 마음의 정황을 표현하는 것이 때마침 내린 우박으로 표현하고 잇는 것 같습니다.

또한 슬픔을 정화해 가는 대나무골 늙은이의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조선시대 나주의 재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주가 수해로부터 좀더 여유를 갖고 대처하게 된 것은 “영산강유역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입니다.

정부에서는 1972년부터 ?영산강 유역 종합개발사업?을 실시하여 1단계 사업으로 상류쪽에 장성?담양?광주?나주등 4개의 댐을, 78년 1월 8일부터 2단계 사업으로 영산강 하구에 길이 4,351m의 영산호둑 설치공사를 시작하여 1981년 2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이러한 대규모의 건설사업은 매년 되풀이되던 홍수와 가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나주에서 일어난 수해를 비롯한 자연재해는 수없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자연재해는 풍수해, 충해, 지진, 뇌성번개, 전염병, 우박, 해일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피해가 심했던 재해만을 기록했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얼마나 많은 재해를 겪었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이 영산강에 제방을 쌓아 재해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재해의 피해상황은 훨씬 심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주에서 일어난 많은 재해 상황 가운데 피해내용이 많은 것을 몇 개 추려서 살펴보면 실록에 기록된 최초의 나주재해는 태종6년(1406) 3월 14일자 기사입니다.

“나주와 완산에 세찬바람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내렸다” 이후 여러 차례의 자연재해가 있었으나 명종 5년(1550) 6월 11일 기사는 당시 나주 읍성을 중심으로 한 피해상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주에 이번 6월 24일 유시(오후5~7)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큰비가 퍼붓듯이 내려 잠시도 쉬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넘친 하천 물이 서성(西城)의 수구(水口 지금의 나주고등학교 앞)와 동성(東城)의 수구(지금의 화남산업 부근)로 몰아쳐서 성이 무너졌고 떠내려간 인가가 16가구이고, 여자 1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 기사의 내용을 보면 금성산 다보사와 오도재쪽의 물이 합류하는 운영지(雲影池)를 지나 운영지 아래쪽의 대곡동(大谷洞, 계곡이 넓고 크기 때문에)과 완사천(지금의 나주천)을 관통하여 영산강(당시는 광탄)으로 흘러가는 물이 피해를 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달 후인 9월 26일자 실록의 기사는 또다시 나주의 물난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수해는 6월의 수해보다 많은 피해를 끼치고 있다.

전라도관찰사 권철의 장계에 “나주에 9월 9일부터 10일까지 큰비가 와서 내와 개천이 넘쳐 나주 동문(東門)으로부터 남평현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영산포로부터 영암 소지포(所只浦)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큰 늪이 되어 그 사이의 논과 밭이 침수되어 남은 것이 없으며, 지금까지 물이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나주는 여러해 동안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유리(流離)하고 전야(田野)가 황폐하였는데 곡식이 익을 때에 또 이지경이 되었으니 온 고을의 백성들이 살아갈 일이 더욱 염려됩니다.”

보고에 접한 명종은 재해피해 상황을 조사하여 보고토록 지시하고 백성의 구제는 감사가 특별히 조치하도록 하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선조1년(1586) 5월5일부터 14일까지 나주 광주 김제 등지에 많은 비가 내려 전답이 침수되고 곡식이 썩거나 손상되었다는 기록 외에도 수차례의 나주 수해 피해상황을 적고 있습니다.
 
한편 나주목 관리들이 기록한 금성일기에 조선 초부터 성종 10년(1479)까지 비바람 등에 의한 재해상황을 조사 나온 관리가 태종 12년(1412, 7월 25일) 풍우손곡형지경차관 황도를 비롯하여 9명의 관리가 파견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보더라도 나주지역이 얼마나 많은 풍수해를 입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나주지역 재해 가운데 수해를 제외한 자연재해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람피해와 지진 등입니다.

현재의 나주인들은 우리지역이 지진으로부터 자유스러운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록의 자료를 보면 7차례나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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