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유동이 많아 키를 고정시키고 자루도 길게 해서 움직이기 좋게 했지만 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수정호의 고장 난 정도가 너무 심하고 항해불능상황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맞바람을 받아 갯바위의 촘촘히 박힌 작은 암초 사이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아무리 노련한 선장이라도 배의 운행방향을 마음대로 조정하기는 어려웠다. 파손된 배는 바람과 조수의 흐름대로 의지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허상리와 김구질회는 부셔진 삿대를 손질해서 사용하려고 했지만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암초지대를 탈 없이 빠져나온 배에 감사 드려야 할 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거친 파도와의 싸움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처절한 투쟁이었다. 태풍의 눈에서 벗어난 것은 차라리 악몽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절규에 가까운 몸부림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정도 위험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경차관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남아있고 배 안의 43명 모두가 상호간에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한 상태다.

새날이 밝았지만 안개가 자욱한 바다는 코앞도 분별할 수 없다. 수정호의 선수에 사람이 서있지만 배의 뒷전에서는 보이지도 안는다.
 
 묘하고 이상한 날씨라 하겠다. 일반적으로 안개가 끼면 바람이 없고 온도가 높은 것이 보통인데 정월의 추운 날씨에 비가 쏟아지면서 안개에 가린 날씨라니 알 수 없는 신(神)의 조화라고 하겠다.

  바가지로 퍼붓는 듯한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손가락처럼 굵은 빗줄기는 배안 밑바닥을 물로 채워버린다. 궂은 날씨가 쉽게 좋아질 리가 없다. 한낮이 되었지만 궂은 날씨는 여전하다.
 
 파도 따라 밀려다니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지 못해 견디어 내야하는 고통이 너무한 것이다.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느라 초죽음이 된 막쇠와 권송이 경차관을 찾아왔다. 사태의 위급함 속에 힘든 물 푸기로 지칠 대로 지쳐버린 그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아무리 배를 고치며 들어온 물을 퍼낸다 한들 다급한 위기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하늘의 신에게 빌어주시지요."
 
 그들은 최부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만큼 충성스런 자들이었다. 귀신을 믿는 치부 어린 그들의 생각은 최부로서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맹랑한 것이었지만 웃어넘길 일도 아니었다. 그런 자들의 애정 어린 당부를 묵살한다는 것은 어떤 요구를 다시 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늘에게 무사를 비는 최부

  최부는 한양을 떠날 때부터 몸 속에 지녀왔던 인신(印信)과 마패를 더듬어 보았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물건들로 경차관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두 손으로 꽉 쥐면서 가슴에 품었다. 그는 상복을 가다듬고 머리에 쓴 상모(喪帽)를 고쳐 썼다. 누런 황포로 만든 모자는 바닷물에 젖은 채 씻겨내려 볼썽 사나왔지만 세탁도 불가능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살수 있으리란 희망을 잃어버린 막쇠와 권송에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주는 것뿐이었다.

최부는 배의 제일 높은 상갑판 위로 올라갔다. 두 손을 모아 빌면서 정숙한 자세로 진심을 담아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막쇠와 권송이 언제 따라 왔는지 판자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채 앉았다.

  "저는 오로지 충(忠)과 효(孝)만을 근본으로 여기며 여태까지 살아온 자입니다. 남을 속여보지도 않았고 원망을 사거나 손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제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지요?
 
하늘은 높고도 높으니 환히 내려다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나라님의 명을 받들어 제주에서 임무수행에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나주의 부친께서 사망하셔서 상을 치러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 같은 혹독한 벌을 주시는지요?
 
혹시라도 저에게 잘못한 허물이 있어서 받아야 할 죄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한 배에 같이 타고 있는 40여명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들이 물에 빠져 죽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목숨을 구해주십시오.

그들은 집안을 지켜오는 훌륭한 가장들로 불쌍히 여겨 바람과 파도를 잔잔하게 잠들게 해주십시오. 죽어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면 집안의 가장이고 지역의 일꾼들입니다. 저도 집으로 돌아가 부친을 선산에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시고 아울러 춘추 70이 된 늙은 노모님을 편안히 봉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야만 나라님 아래 몸을 굽히고 신하의 노릇을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라면 죽음이 닥쳐와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최부는 배 안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주문하듯 간절하게 외쳤다.

그의 거짓 없고 솔직하며 진실 된 말에 그를 따르지 않던 자들도 마음의 감동을 받아 수그러들었다.

최부의 글썽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부만을 믿으며 따르던 막쇠가 와락 달려들며 허리를 껴안았다.

  "경차관님! 난파선 속에서 이게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저만을 믿고 고락을 같이해온 저의 가족들은 저를 기둥처럼 여기며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바다 속의 물귀신이 된다면 다시는 집안 식구들을 못 볼 것이 아닙니까?"

  막쇠와 권송은 갑판을 둥둥 구르며 펄펄 뛰었다.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자국이 흥건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배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듣고만 있던 다른 사람들도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도와주기를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