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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떠나는 어느 하루
송용식  |  songys8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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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승인 2023.04.24  00: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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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용식 수필가

몇 권의 책과 옷가지만 넣은 캐리어를 들고 나서는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내가 따로 짐보따리를 들려준다. 사나흘 머무는 동안의 밑반찬들을 챙긴 것이다. 막상 떠나보면 당장 필요한 일이 먹는 일이고 먹을 것들인데도 늘어난 짐이 거추장스럽다.

SRT 대합실. 이쪽과 저쪽이 한걸음 차인데 대합실에 들어서면 여전히 설렌다. 서둘러 가라는 아내의 재촉에 목포행 승차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스피커 음악인가 싶었는데 실제 누군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있다. 관심과 무관심이 섞인다. 들어볼까? 그냥 갈까? 
 
이런 기억이 있다. 친구와 유럽 배낭여행 중 독일 드레스덴 역사(驛舍) 레스토랑에서 당시 서울시장 선거를 놓고 갑론을박하다 열차를 놓쳤다. 밤은 깊어가는데 프라하로 가는 열차는 끊기고 예약해 둔 호텔도 없어 기차역 주변 밤거리를 헤맸던 기억. 열차를 놓칠까 봐 음악을 뒤로하고 게이트로 들어간다. 앱을 열어 열차와 좌석번호를 확인한다. 옆자리 손님이 슬쩍 궁금해진다. 문학과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실제 삶을 뒤흔들 인연이 옆자리 그 누군가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 궁금함은 인연에 대한 기대보다 여행에 불편함이 없었으면 하는 그 정도다. 
 
승차하면 일단 책을 꺼내 놓고 창밖에 시선을 둔다. 불쑥 어떤 생각이 찾아오면 생각이 제 길 찾아 흘러가도록 그대로 놔둔다. 아주 가끔 멋진 말이나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떠오를 때도 있다. 책을 펴든다. 정독하는 습관 탓에 완독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다 읽지 못한 책은 은근히 부담이 컸으나 그 부담을 덜게 한 것은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님이다. ‘완독하지 않아도 좋다. 풀 뜯어 먹는 소처럼,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그렇게 재미없는 부분은 건너뛰고, 재미있는 부분은 닳도록 읽으라는 것이다. 그 말씀이 왜 그리 와닿던지. 덕분에, 다 읽었다, 몇 권을 읽었다는 양(量) 중심의 완독 주의가 아니라 한 페이지 한 문장을 읽어도 제대로 읽는 질(質) 중심의 정독 주의를 부담 없이 지킬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오늘 챙겨온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소 풀 뜯듯이 읽는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읽어서인지 완독한 기억이 없다. 까무룩 졸음이 온다. 익산역이다. 벚나무에서 꽃비가 소문처럼 날린다. 누가 바람이 난 모양이다. ‘상처도 꽃잎’이라는 이정하 시인이 보고 싶다. 
 
나는 나주역에서 내려 다시 남평으로 가야 한다. 열차가 송정역을 출발하면 곧 나주역이니 신경을 써야 한다. 아차 하면 종착역인 목포까지 가버리니까. 그러나 훌쩍 떠나온 발걸음이 목포에 닿으면 어떤가. 이만큼 살아보니 잘못 든 길도 길이요, 기회가 돼주기도 했다. 덕분에 목포 밤바다와 소주 한잔 대작(對酌)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남평 거처에 도착했다. 드들강변에 아파트 월세를 얻어 놓고 떠나고 싶을 때 지내다 가는 곳이다. 거실 앞 창문을 활짝 연다. 우선 목말랐을 화초의 갈증을 풀어주고 강변을 내려다본다. 강변 둔치의 유채꽃 소식이 더디다.
 
남평 생활은 내게 변화를 주었다. 턱수염을 길렀다. 헤밍웨이 턱수염이 멋져 보여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은 외양이 달라지면 그에 맞추어 의식도 뒤따라올 거로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수염을 밀어버렸다. 외양만큼 정신의 흐름이 따라오지 못하다 보니 수염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저질러 봤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리고 자전적 에세이집 ‘놓았던 손 다시 잡으며’를 발간했다. 남평을 오고 가는 길과 혼자 머무는 시간에서 잊고 살아온 지난 것들을 만났다. 책에는 그 이야기들을 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언젠가 춤 학원을 기웃거린 적도 있었다. 몸의 유연성이 사고의 유연성과도 연결되지 않을까 해서다. 동네 교습학원에 갔더니 “사모님과 함께 오세요” 했다. 아내의 눈 흘김에 포기했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다시 어떤 학원을 찾아갔다. 춤추는 순간의 그 온전한 느낌이 많이도 궁금했다. 상담하는 분이 나를 쳐다보더니 “여기는 선생님 같은 분이 오는 곳이 아니고 아이돌의 예능 준비를 위한 학원이에요” 
 
남평에서는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 되게 한다. 훌쩍 떠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를 훌쩍 일상과 떼어놓을 줄 아는 용기, 그 후에 오는 자유를 만날 때 나는 느낀다. 지금 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사업에 망한 조르바가 바질과 해변에서 천진난만하게 춤을 추는 장면이 오래오래 남아있다. 반신욕을 끝내고 거실로 나간다. 불을 끄고 밤을 내다본다. 한 남자가 희미한 실루엣이 되어 알 수 없는 외로움과 마주 서 있다. 유튜브의 ‘조르바 댄스’를 따라 춤을 춘다. 산투르 템포가 점점 빨라진다.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몸이 굳었다.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떠나지 못하면 나중에 훌쩍거리게 된다." 가까운 후배가 우스개처럼 들려준 이야기다. 맞는 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음으로 미루다 보면 떠나고 싶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다. 조르바처럼 춤을 추고 싶은데 해변이 없네…. 가 아니라 춤을 추고 싶으면 그 자리에서 추면 된다. 순간순간 마음을 따르는 일, 그래서 지금을 소중히 여기는 일, 카르페 디엠이라 했던가. Carpe Diem!! 이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드들강의 어둠이 이부자리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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