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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4)김병균(평통사 공동의장)
김병균  |  njt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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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8호] 승인 2023.02.06  0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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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균(평통사 공동의장)

1944년 양금덕(1929·95세)이 나주초등학교(당시 대정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던 때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양금덕은 일본에 가면 ‘돈도 벌 수 있고, 중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근로정신대를 지원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양금덕을 비롯해 같이 끌려갔던 소녀들은 모진 고생을 하고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 한마디 못 받고, 임금 한 푼 못 받은 채 한 많은 생을 마감할 단계에 놓여 있다. 천신만고 끝에 2018년 대법원으로부터 ‘일본기업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야무야 미뤄오다가, 이제야 우리 정부가 강제 동원 피해자들이 별도의 재단을 통해서 ‘판결금을 지급할 수 있도록 하는 안을 내놓았다. 소위 ‘제3자 변제방식’인 ‘중첩적 채무 인수’라는 방안을 내놓은 것이다. 일본기업 대신 채무를 인수하여 ‘판결금을 지급할 주체에 관련해서는 현존하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단체〉를 지목했다. 이에 반해 피해자 측에서는 ‘먼저 피고 기업의 기여와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양금덕 할머니는 ‘돈보다도 먼저 사과해라’ ‘우리도 살 만큼 산다. 왜 일본 미쓰비시가 내야 할 피해배상을 우리 기업이 내야하느냐. 왜 피해자들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느냐’라면서 맞서고 있다. 뜻있는 국민은 강제 동원 문제가 굴욕스러운 해법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피해자들이 사과받고 배상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정부의 강제 동원 해법으로 일본에 굴욕스러운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간 상식과 도리로도 맞지 않는다. 이런 저자세 굴욕외교로는 한일관계가 절대로 풀릴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양금덕의 대일 손해배상청구 투쟁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      
 
화순으로 시집간 둘째 언니가 친구의 남동생을 신랑감으로 소개해 주었다. 이름은 박옥식(朴玉植)이었고, 나이는 여섯 살 연상이었다. 양금덕은 1949년 나주 친정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일은 친정집에서 잤다. 다음날은 신랑과 함께 시댁으로 갔다. 사진사가 출장해 와서 사진도 많이 찍었다. 넷째 언니가 그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듬해 1950년 6.25 전쟁통에 모두 잃어버렸다. 지금 와서는 사진 한 장도 남지 않았다. 
 
결혼 후 양금덕은 남편을 따라 화순읍 광덕리로 이주해서 살았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 목수 기술을 갖고 있었다. 주로 학교 교실을 짓고 다녔고, 상당히 솜씨가 좋았다. 남편은 마음 씀씀이도 좋았고, 이웃과도 원만하게 잘 지내는 성품이었다. 결혼 전부터 남편은 화순에서 의용소방대장을 맡아 활동했다. 보수는 없었고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봉사한 것이었다.
 
양금덕은 남편의 소방복과 구두를 손질해서 챙겨두었다가 비상 연락이 오면 남편에게 내어주었다. 결혼을 한 다음 해에 6. 25전쟁이 일어났지만, 따로 피난을 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휩쓸려 어느 한쪽에 가담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시댁에서 파놓은 방공호에 들어가 잠을 자고 나와 시장에도 가고, 평소대로 활동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부산에서 왔다는 학생 두 명에게 밥을 해 먹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했다. 양금덕은 학생들에게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그 학생들은 양금덕의 말을 듣고 부산으로 돌아갔다. 첫 아이는 전쟁이 터진 해에 낳았다. 그러나 불과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2남 1녀를 더 두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잘 살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일본에서 남자를 몇 명이나 상대했느냐?”, “더러운 년”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양금덕은 결혼해 살면서 언니들과 만나면 일본말을 주고받으면서 떠들 때가 있었다.
 
이것을 본 남편은 ‘자네는 고생을 많이 하면서 컸다면서 일본말을 그렇게 잘 한당가?’ 양금덕은 “일본사는 오빠 덕분에 일본서 공부해놔서 일본말을 하게 됬지라우.” 나고야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남편이 혹시 일본 군인들을 상대하다 온 여자로 생각할까 두려웠다.
 
남편은 양금덕의 말을 믿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싸움은 반복되었다. 결국 남편은 다른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려 집을 나가 버렸다. 10여 년이 지났을까 어느 날 남편은 병든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그 여자 사이에 낳은 아이 셋을 데리고 들어왔다.
 
양금덕은 서른세 살 무렵 아이들을 공부시키려고 화순에서 광주로 이사를 왔다. 광주역 근처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역전에서 껌과 빵을 팔았다. 남편은 막내가 태어난 지 채 2살도 되지 않았을 때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양금덕은 미쓰비시 정신대에 끌려간 것이 화근이 되어 일생은 슬프고도 고단하게 살아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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