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에 오면 빼놓지 않는 일과가 있다. 드들강변을 걷는 일이다. 아침과 저녁 하루에 두 번 걷기도 한다. 걷고 나면 몸도 말랑말랑해지고 마음도 가벼워져 어느덧 중독된 듯하다. '마음을 데리고 나오는 마음의 외출'. 가성비 최고의 셀프 처방이다. 

 

동트는 강변길, 동살 덕분에 멀리 능선이 이어지는 푸르스름한 산마루가 수채화 한 폭이다. 돋을볕이 쌀쌀한 강바람을 밀어내고 곳곳에 온기를 부려놓는다. 늦잠을 잔 듯 물안개가 주섬주섬 일어선다. 새벽 강변을 걸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꺼운 일인가.

 

강바람을 타고 내려온 햇귀가 둔치 위에 내려앉는다.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나누던 유채꽃과 코스모스 씨앗도 머지않아 동안거(?)에서 깨어날 것이다. 자연의 순환은 그들의 화려한 귀환을 기다리고 내 생의 나이테는 또 하나의 원을 그릴 것이다.

 

드들강은 작고 소박하여 강이라기보다 큰 개천에 가깝다. 부지런하여 한 번도 얼어본 기억이 없이 평생 제 속도를 지켰을 것 같다. 바람과 폭우가 잠시 등을 떠밀기도 했겠지만 결국 달팽이 속도로 흘렀을 생이다. 갈대숲 가장자리에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외다리로 서 있는 백로 두 마리가 보인다. 무심한 듯 외면하고 서 있는 백로를 다른 백로가 쳐다보고 있다. 시선이 서로 엇갈려 있는 풍경이 아득하다. 한 시간 남짓 걷다 돌아오는 길. 출근길 차량으로 강변 제방길이 바쁘다. 오늘도 하루를 저리 시작하는구나. 

 

오후에 강변을 찾기도 한다. 겨울 오후 강변은 유독 고요하다. 바람에 서걱이는 마른 억새가 적적함을 더한다. 희미한 햇살조차 반갑고 따스하다. 새벽에 보이지 않던 것이 오후에 보이기도 한다. 꼭 뒤돌아보아야만 보이고 멈춰야 들리는 것일까.

 

물오리 떼가 군데군데 모여 있다. 어미 오리가 새끼오리 떼를 한창 교육 중이다. 어미가 물속에 고개를 박았다가 고개를 털며 하늘을 보면 새끼들도 그대로 따라 한다.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잠시 한눈을 파느라 가족과 멀어진 새끼 오리들이 부지런히 뒤따라 모여든다. 새삼 가족을 생각한다.

 

어느 사회학자는 가족의 개념을 이렇게 내렸다. ‘어디에 있느냐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서로 나누어 가진 구성원’이라고. 서로 떨어져 생활하는 게 불가피한 요즘 가족 세태에서 무척 공감이 가는 말이다. 한마디 덧붙여보면 어떨까. ‘나 지금 어디에 있노라고 말할 의무를 진 구성원이 가족’이라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강변길을 걷고 있다고. 조금 쌀쌀하지만 걸을 만하다고. 

 

바람은 눈(目)으로 오고 소리로 오고 촉(觸)으로 온다. 바람결에 들리듯 지난 회억(回憶)들이 감성의 그물에 걸린다. 누구에게나 굴곡진 삶이 왜 없었을까만, 청소년기의 불안정과 불성실했던 대가를 오랫동안 톡톡히 치렀다. 때로는 소문나게 때로는 소리소문없이. 그 과정에서 새겨진 화인(火印) 같은 열등감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성장의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난 부러우면 진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부러워해야 나 자신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으니까. 자존감을 찾기 위한 힘들고 외로웠던 길을 많은 분이 어깨를 내주고 길잡이를 해주었다. 고비마다 곁을 지켜준 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많은 인간의 교집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어찌 좋은 인연만 있을까. 인복이 많았던지 좋은 인연들 덕분에 먼길 힘든 줄 모르고 걸을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했다. 인격(人格)이 모여 사격(社格)이 되고 사격이 합해져 국격(國格)이 된다고 믿었다. 예의의 무게가 한 인간의 품격이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살아오며 저질렀을 무례함에 얼마나 둔감했는지를 물어본다. 

 

돌아오는 길에 며칠간의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Y 마트에 들렀다. 이것저것 사서 계산대에 올려놓으니 “이번에는 혼자 내려오셨나 봐요?” 시간제로 일하는 박 여사가 마스크 너머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셨다. 서울과 남평을 오가며 생활하는데도 붙임성 좋은 아내와 친해져 가까이 지내고 있는 분이었다.

 

“지난번에 사모님이 주신 선생님의 에세이집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쉽게 읽히면서 참 따뜻하데요.” 하면서 조그만 봉투 하나를 내민다. “책값이에요, 이런 책은 사서 읽어야 하는데 그냥 받았으니 책값은 드려야지요.” 평소에 준비해 두었다 아내나 내가 들르면 전해 줄 요량이었나 보다.

 

받니 안 받니 실랑이를 하다 주변의 시선도 있고 해서 받아 가지고 왔다. 만 원권 한 장과 오천 원권 한 장. ‘주신 책 잘 읽었습니다. 재미있던데요’라는 인사말만 해도 될 텐데 굳이 책값까지 주신 Y 여사님. 하찮다면 하찮은 일이지만 처음 겪는 일이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몸짓이 천성적인 배려심인지, 어려서부터 쌓은 누군가의 가르침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분의 예의 바른 성품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이런 분이 주변에 계신다는 것, 더 많은 분이 계실 것이라는 생각. 언젠가 그물에 걸리는 바람도 기억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