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일반인이 친근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열린 수도원을 지향하던 김 비안네신부님이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주차장에서 수도원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잡초와 넝쿨이 창문까지 뻗어 있는 낡은 창고 하나가 있었는데, 그 창고를 고치기로 한 것이다. 몸체만 놔두고 여기저기 모조리 뜯어내서 얹고 바르고 칠했더니 새 건물이 되었다. 수녀님들이 벽화를 재능기부 해준 덕분에 멋이 더해졌다. 버려졌던 창고가 ‘수도원 창고’라는 카페 간판을 붙이고 문을 열었다. 

 

여섯 평 남짓한 내부는 예닐곱이 앉을 만한 탁자와 조그만 주방에는 냉장고, 수제 맥주를 만드는 장치, 커피 원두와 로스터까지 갖췄다.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내부 디스플레이를 보면 김 신부님의 안목이 드러난다. 간판 밑에 부제처럼 적힌 아틀리에, 갤러리, 카운슬링, 드링크를 보니 이 공간의 쓰임새를 알 것 같다. 변화의 시작이었다.

 

수도원 건물 앞마당 정비는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정 사장이 나섰다. 쓸모가 없어진 파고라와 밑동이 잘린 채 그 위를 덮고 있던 마른 등나무 넝쿨 모두를 철거했다. 성모상 뒤에는 회색 질감의 조경 블록으로 아트월을 쌓고 그 앞에 단을 만들어 성모상을 향해 기도하는 여인상을 설치했다. 아프리카 조각품을 수집해 왔던 정 사장이 그 분위기에 맞는 짐바브웨 작가의 작품을 기증한 것이다. 마당은 풀이 자라지 못하도록 자갈을 깔고 마당 입구 양쪽에는 수형이 우아한 소나무 두 그루를 이식했다. 그러고 나니 성모상 앞마당 표정이 환해졌다. 선물 같은 변화였다. 

 

내친김에 피정동 3층 다섯 개 실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김 신부님과 정 사장이 적잖은 공사비를 고민하더니 실별로 기부금을 받고, 마무리되면 그 실에 기부자의 이름과 세례명을 붙여주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 생각에 설득력이 있었는지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각 실마다 침대를 들여놓고 화장실을 겸한 샤워실을 새로 설치했다. 낡은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은 철거하고 미술 치료실과 심리치료실로 바꿨다. 간단한 음식을 조리하고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휴게실도 만들었다. 자재 선정부터 마무리에 이르는 동안 정 사장과 김 박사의 아이디어 충돌로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그나마 여름 더위를 잊게 하는 즐거움의 하나였다. 

 

그 이후 다시 본원에서 일부 지원을 받아 신부님들만의 노동력으로 피정동 2층까지 새 단장을 마쳤다. 작년 가을이었다. 

 

얼마 전에는 ‘수도원 맥주’가 ‘동신대학교 글로벌 창업캠프’ 경진대회에서 우수 아이템으로 선정되어 최우수상을 받았다. 왜관에 있는 베네딕토수도회의 소시지처럼 전국적으로 소문난 ‘수도원 맥주’로 나서지 않을까. 지금쯤 김 신부님은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축구장과 농구장의 또 다른 쓰임새를 구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 크게 열릴 수도원의 변신이 궁금해진다.

 

나비를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꽃을 심고 가꿔야 하듯 새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나무를 심고 가꿔야 한다. 숲을 찾아 새들은 날아올 테니까. 삶이 힘들고 지쳤을 때 누구나 찾아와 잠시 피정하며 쉼을 가져보면 어떨까. 그리하라고 꽃을 심고 나무를 심듯 김 신부님과 인도 세바스찬 신부님, 정 사장과 황 감사, 김 박사와 염 박사는 땀을 흘렸으리라.

 

3층 리모델링이 끝났을 때 김 신부님이 맨 처음 피정 손님으로 우리 부부를 초대해 주셨다. 와인이 곁들여진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 나와 아내는 우리의 이름과 세례명이 붙여진 각자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무거운 정적. 수도원에서 하룻밤이 생소하고 어색하여 잠시 깜깜한 창밖을 내다본다. 밖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통창에 내 모습만 비친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어 보이는 얼굴.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몇 년 전 화제가 되었던 김혜자 선생님의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이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모처럼의 평안에 쉽게 잠들지 못했던 수도원의 밤. 섬처럼 조용히 출렁이다 서서히 가라앉았을 것이다. 눈을 떴다. 햇살이 성령처럼 비추고 창밖 새소리가 복음처럼 들리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