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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창동 19통 텃골마을
김덕수 객원기자  |  najukd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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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1호] 승인 2022.10.24  05: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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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고인돌 유적 40여기가 수천년 마을 역사 보여줘

탁 트인 마을 앞 가로막은 농공단지에 생계터전 논밭 빼앗겨
끈끈한 주민화합 이어준 당산제, 코로나 후 마을계로 복원 계획
 
가야산 남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이창동 19통 텃골마을은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옆 언덕에 있는 청동기 장례문화인 고인돌 40여기가 이를 증명한다. 한 때 70여 호 300여명이 살던 마을은 이제 20여호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텃골과 함께 마을을 이루던 능동, 원기둥, 정텃골, 안성골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논밭이 됐다. 왕실예에는 1가구만 쓸쓸히 남아 있다. 
 
“마을 곳곳에서 고려청자가 나왔는디, 일본 사람들이 모두 캐가는 걸 내 눈으로 봤당께” 텃골에서 나고 자란 이종출(92세) 씨의 말이다. 고인돌 옆 배추밭에 거름을 주며 “영산강이 접해 있어 고인돌과 고려청자 같은 문화재가 많이 나온 오래된 마을인디, 제대로 조사되거나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는 게 안타깝다”는 이 씨의 말이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 마을사람들이 만든 기능저수지 뒤로 텃골마을이 가야산을 병풍삼아 자리하고 있다.
 
방목들 건너 금천면 강골이 고향인 이양순(93세) 씨는 “열아홉에 결혼해서 봉황서 살다 전쟁이 한창이던 51년에 텃골로 이사해 와 이제껏 살았제. 살아온 날을 이야기하믄 말로는 다 못헌당께. 보리쌀 갈아서 호박잎 넣고 죽 쒀서 묵고 살았응께”라며 옛일을 떠올린다. “영산강이 바라보이는 마을 앞 논밭이 생계터전이었는디 농공단지가 생기면서 모두 빼앗긴 꼴이 돼 부렀어”라는 이 씨는 평생 일궈 온 8마지기 논이 수용되고 1마지기만 남았단다.
 
“얼굴 이뿌단 소린 몰라도 손 이뿌단 소리는 많이 들었제”라는 박영례(82세) 씨는 “새벽 3시부터새내끼 꼬고 가마니 짜서 이고지고 가야선 넘어 영산포 장에 내다 팔아 묵고 살았응께”라며 두 손을 내 보인다.
 
“22살에 텃골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자식들 굶길까 잠 못 자며 시간을 쪼개서 일했다”는 박 씨는 “단칸방 생활 5년만에 오두막집을 마련했고 혼자 되신 친정어머니를 20여년 모셨다”며 산포면 화지리 고향까지 걸어다녔던 기억을 떠올린다.
 
농공단지에서 자동차정비업소를 운영하는 나경수(60세) 씨는 중학 1학년 때 남평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고향인 텃골에서 살았다. “날마다 오르내리며 놀던 가야산은 우리들한테 종합운동장이었제. 선배들이랑 어울려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겨울에는 토끼잡으러 뛰어다녔다”는 나 씨는 “텃골에만도 큰 샘이랑 작은 샘이 두 개나 있었는디, 지금은 큰샘은 없어졌고 작은 샘만 쓰임새 없이 남아있다”고 한다. 
 
텃골에서 가장 어리다는 임수경(20세) 씨는 반려견 ‘달’이랑 마을을 산책하는 게 매일 일과 중 하나다. “어려서 같이 학교 다니며 놀던 언니가 두명 있었는디 지금은 모두 떠나고 없다”는 임 씨는 “또래 친구는 없지만 핸드폰이 있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 고인돌 옆 배추밭에 거름을 하던 이종출(92세)씨가 고인돌과 마을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객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고향으로 돌아온 이순봉(77세) 씨는 “고향집에 살면서 관로 만드는 회사에서 20여년 근무하다 은퇴했다”며 “마을사람들한테 일자리를 주겠다는 처음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외지인을 채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공단이 들어선 뒤 탁 트인 마을 앞을 가로막고 논밭이 없어져 마을의 살림살이만 더 힘들어졌다”는 이 씨는 “매년 1~2개씩 집터가 사라지며 마을의 형세가 바뀌어가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다”며 한숨을 짓는다.
 
“어릴 적에만 하더라도 가야산 중턱에 서당터가 있었다”는 임형권 통장(60세)은 “20여년 전 태풍으로 마을 가운데 있던 당산나무가 쓰러져 사라지는 아픔이 있었다”며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치기 전까지 매년 정월대보름에 산신제를 겸한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사람들이 화합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임 통장은 “그런 전통이 있어서인지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자주 모여 함께 식사하고 마을 일도 상의하며 끈끈하게 잘 뭉친다”며 코로나 위기를 이겨내고 나면 다시 마을회관에 상을 차려 마을계로 복원할 것이라고 밝힌다. 텃골마을 당산제가 마을계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임형권 통장 인터뷰

“부모님이 만들어준 또래모임이 마을의 뿌리”
 
“고3 때 만든 마을 친구들 모임이 40여년 동안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어요”임형권(60세) 통장이 태어난 텃골마을에 또래 친구들이 17명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내어주신 보리쌀 1되가 회비였다”는 임 통장은 “한되한되 모아서 장에 내다 팔아 회비로 만들어 모임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니까 사실상 부모님들이 만들어준 모임이고 텃골의 미래를 책임질 뿌리”라고 자랑한다. 객지로 떠난 7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1년에 두 번 만난단다.
 
손가락을 다쳐 병역을 면제받은 임 통장은 20대 때 5년여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친구들처럼 도시에서 넥타이 매고 출퇴근하는 삶을 꿈꿨지만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해야 하는 장남의 숙명처럼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이 피땀으로 일궈주신 전답이 없었다면 고향으로 내려올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임 통장은 “7년 전부터 3천평 과수원을 빌려 집사람과 함께 배농사를 짓고 있다”며 그 전까진 쌀농사만 지었다고 한다. 과수원에서 출하준비에 여념이 없는 임 통장은 “우리 지역은 배 주산지라 출하량에 따라 가격변동이 크지만 부산은 꾸준히 시세를 유지하기 때문에 부산청과시장으로 보낸다”고 한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부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다 만났단다. “집사람이 없었다면 고향으로 내려오는 것도, 살림살이 일으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임 통장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이창동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아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2남2녀를 잘 키운 것도 부인 덕이라고 덧붙인다.
 
“되돌아보니 고향에 잘 내려온 것 같다”는 임 통장은 앞으로도 부인과 함께 마을과 지역을 위해 성실히 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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