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바다에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배는 그야말로 일엽편주요, 하늘거리는 풀잎에 불과하다.

수정호가 파도에 쏠려 온통 짠물을 뒤집어 쓴 채 겨우 몸체를 드러내는 위험한 순간에 선장이 다시 나타났다. 이미 잘려버린 돛대의 밑 둥을 붙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제주할망 신(神)이 우리를 지켜줄 것입니다. 전능하신 할망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난파의 위기를 벗어납시다."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파도가 밀려왔다. 듣고 있는 자들은 몸을 납작하게 엎드려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건 붙들어 잡아야 떠밀리지 않는다.

바닷물 속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면 잡아 올릴 수도 없다. 파도가 밀려간 자리에는 하얀 파도의 잔물결이 거품을 일으키며 가라앉는다.
  수정호의 바닥 층 창고 같은 선실에 있던 물건들이 둥둥 떠다닌다. 갑판에 있던

여러 가지 나무 조각들도 바람과 함께 파도에 떠밀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거친 파도와 심한 바람 때문에 배 안의 물건들이 뒤엉켜 쓰레기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수정호의 상층에 자리한 선장실의 지붕이 절반쯤 벗겨져 날아갔다. 바닷가 부들을 뜯어 지붕을 덮었는데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벗겨진 것이다. 선실에 넣어둔 여러 가지 옷들이 모두 물을 먹어 젖어버리고 말았다.

  입고 있던 옷도 바다 물에 젖었다. 북풍이 불어올 때는 매서운 칼바람으로 뼈를 깎는 추위가 몸속 깊이 파고든다.

기력이 부치고 힘이 빠진 이들이 덜덜 떨며 여기저기 흩어져 죽기를 기다린다. 그때 선실 안에서 난데없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아이고."
 
 물을 푸던 오산이 선실 천장에 목을 매달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굵은 못을 천정에 박았다. 튼튼한 동아줄을 찾아 못에 달고 고리를 지어 물통을 딛고 올라서서 매듭진 줄에 목을 걸었다. 줄을 팔로 잡아당기며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다.

  끙끙대며 힘을 썼다. 몸을 위로 들어올리며 두발로 딛고 끝까지 서있던 물통을 힘껏 차버리자 몸이 선실 가운데에 둥둥 뜨면서 대롱대롱 매달렸던 것이다.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발악을 하며 소리를 지르게 된 것이다.

  다급하게 질러대는 소리를 들은 이정이 뛰어왔다. 조금 전까지 물을 퍼내던 오산이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아! 무슨 짓인가."

  양발에 기운이 빠지며 축 처져 가는 몸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힘이 부쳤다. 마침 안의가 들어와 둘이서 오산을 들어올려 간신히 목에 감긴 줄을 풀 수 있었다. 한바탕 자살소동은 미수로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살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걸고

  최부는 배에 탄 이들이 희망을 버리지 말고 살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해주는 것이 급하다고 여겼다. 날씨가 조금은 잠잠해지는 꼴이다. 어쩌면 죽지는 안을 성싶다.

  "배는 아직도 튼튼하다. 위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틈새로 들어오는 물만 막는다면 우리 배는 안전하다."

  총무 안의(安義)가 덩달아 외쳤다.

  "배에 찬 물을 퍼내지 않는다면 앉아서 죽기를 바라는 짓이요, 물만 퍼낸다면 반드시 살길이 있을 것이다."

  살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생명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되며 붙잡아야 한다. 먼저 갑판 위에 불을 밝혀야 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 날아다니는 돗자리를 긁어모았다.

돗자리를 길쭉한 장대에 돌돌 말았다. 조금은 느슨하게 철사로 동여매듯 돌리면서 감은 것이다. 물기를 빼고 선실의 기름통을 가져오도록 했다. 빗질하듯 기름을 돗자리 위에 발랐다. 배 안을 밝혀줄 임시 등인 것이다.

  그런데 부싯돌의 씨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요령 좋은 권송이 아무리 애를 써도 불이 점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불쏘시개로 써야할 솜뭉치가 젖어있었는데 이를 몸으로 말려야만했다. 물기를 전부 뺀 다음 손바닥으로 비벼댔다. 뽀송뽀송해지자 작게 찢어 바람에 날려보았더니 날수 있을 정도로 말랐다. 한참 만에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배 안이 훤해지자 사람들의 눈동자가 살아나고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광명의 세계로 나온 듯 밝은 불빛이 용기를 갖게 한다. 천만다행으로 바람이 누그러졌다.

지금 배 안을 정리하고 물을 퍼내야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항해능력이 없는 배이지만 물 속에 가라앉는 최후의 순간까지 지켜야 살아날 수 있다.

  최부가 선장실로 들어가서 선장과 총무 안의를 쳐다보자 그들은 경차관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서둘러 배를 정비하겠습니다."

  둘이는 먼저 초근보와 고복, 그리고 김고면을 불러 물이 새는 곳을 찾아 빠짐없이 막도록 했다.

그들은 수정호를 처음에 만들 때부터 함께 일한 사람들로 물이 샐만한 곳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파손된 배를 수리하고 목재를 다듬어 끼우며 물이 들어오는 구멍을 막는 것은 까다롭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으나 이들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처음 건조 시에 일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 배의 곳곳을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들만의 뛰어난 항해술과 함께 축적된 선박건조 노하우가 손안에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