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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금천면 오강리 금구마을을 가다
김덕수 객원기자  |  njt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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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호] 승인 2022.08.01  00: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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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원·면장 각 3, 조합장 2명 배출한 금천면 중심상권

도시화로 원주민과 외지인·상가 혼합된 구석기 유적이 출토된 마을
사라진 오일장과 유동인구 감소로 경제 위축…다시 발전할 조리명당

   
▲ 금구마을은 연립주택에 이사 들어온 외지인들이 많다. 가운데 파란지붕이 금구마을회관.

금천면 오강리 금구마을은 나주시의원과 면장을 각각 3, 농협조합장을 2명이나 배출했다. 한 마을에서 이처럼 많은 인물이 나는 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김용경·박영주·박환균 전 나주시의원과 초대 김달두 면장에 이어 김동춘·김용관 면장, 김용문, 김용기 조합장이 주인공이다.

“금구에만 자전거수리점이 4곳 있었는디 지금은 나만 남았어.”금천면에서 유일한 자전거가게를 52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정곤(72)씨는 금구마을이 고향이다. “자전거를 수리하기 위해 산포면이랑 봉황면까지 가지만 출장비는 따로 받지 않는다”는 김 씨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전거를 고쳐주는 보람에 산다”고. 1990년부터 2000년까지 이장을 맡기도 했던 김 씨는 “파출소 뒤편은 야산이었고 건너편 대일주택 일대는 논이었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나주배를 이용한 양념에 재워 하루이틀 숙성시켜 연탄불에 구워팔던 돼지불고기가 인기여서 인근 광주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서 사먹곤 했제”김용경(74) 전 나주시의원은 금구마을 상권이 활황이던 옛 일월식당의 기억을 떠올린다. “오래된 단골들이 간판을 보고 찾아와 가게에 걸어놓은 금천초등 체육복을 보며 학창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는 손님들이 있어 문구점 문을 닫지 못한다”는 대성문구 이정남(71) . 장흥이 고향인 이 씨는 1983년 대성문구를 열었다.

   
▲ 금천면 최대 상권인 금구마을이지만 갈수록 유동인구가 줄어들면서 빈 상가가 늘고 있다.

금구마을은 형세가 거북 모양이라 해서 쇠 금자, 거북 구자를 쓴 것으로 전해지며 1970년대 중반까지 현 택시승강장이 있는 자리에 매 2일과 7일에 오일장이 섰다고 한다. 주로 곡물과 의류, 잡화 등을 거래했으며 어물전도 열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면사무소와 초등학교가 있는 금구마을은 학생들과 주민들로 ‘북적북적’한 금천면의 중심상권이었다. 장이 섰던 옛 삼거리 일대는 쌀을 일어 돌을 거르는데 썼던 조리 모양으로 옛 어른들은 ‘조리명당’이니 30여년 후면 번성할 것이라고 했다며 다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북 남원에 살다 병자호란을 피해 내려온 김해김씨가 1848년 처음 터를 잡은 탓에 여전히 김해김씨가 가장 많다. 금천초등 뒤편 구릉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출토돼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2011년 입주한 지오빌과 함께 70~80년대부터 삼보주택과 대일주택, 금천다세대 등 연립주택들이 들어오면서 외지인들이 이사왔다고 한다. 4년째 이장을 맡고 있는 조두형(58)씨는 “200여세대나 되는 금천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지만, 원주민은 20여가구에 불과해 마을일 하기가 만만치 않다”며 “마을방송이 높은 건물에 막히는 바람에 직접 찾아가거나 전화해서 협조를 구하고 있지만 참여율이 낮다”고 한다. 조 이장은 “도시화로 인한 피해를 입는 마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며 “상가와 농사를 짓는 주민들간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는 면도 있다”고 한다.

   
▲ 김홍덕, 김영순(가명), 배금희, 최연순씨(왼쪽부터)가 금구마을회관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이웃들과 함께 어울리던 김홍덕(83)씨는 “어려운 살림살이로 힘들어하다 우연히 접목일을 배우게 됐다. 첨 일을 배우던 80년대 말 하루 일당이 3천원인데 접목은 8천원이었다”면서 “바쁜 봄철에 일해 1년을 생활할 수 있는 전문직으로 여자 몸으로 이만한 직업이 없다”고 어깨에 힘을 준다. 68년 결혼하던 해에 포도를 심었지만 이후 배로 바꿔 최근까지 600여평 배과수원으로 아들과 딸을 키웠다는 최연순(79)씨는 산포가 고향이다.

상추와 오이, 가지, 화훼 등 특수작물로 시동생 넷과 5남매를 키우느라 평생을 보냈다는 김영순(67, 가명)씨는 “잘 될 때는 돈을 갈쿠로 긁어불 정도였제”라며 “공부 잘하던 둘째 딸이 고등학생 때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못 보낸 것이 지금도 한이 된다”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배금희(78)씨는 교통이 불편해서 고향 화순을 자주 다니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91세로 마을에서 최고령인 순천댁과 샛골댁이 가까운 요양원에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도 못가고 있다”며 “조만간 짬을 내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한다. 하루 빨리 이들의 바람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조두형 금천면 오강리 금구마을 이장 인터뷰

20여년 객지생활…“착한 아내에 보답하고파”

   
 

“뭐니뭐니 해도 고향만한 곳이 없지요!” 광주로 고등학교를 가면서 고향을 떠나 부산과 서울, 광주 등 객지에서 직장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 20여년만인 1999년 고향으로 돌아온 조두형(58, 사진) 이장은 “부모님 모신다는 핑계로 고향에 정착했지만 그 그늘에서 자리잡았다”고. 43녀의 막내지만 남매들이 모두 객지에 살고 있어 연로해 가시는 부모님 걱정에 귀향을 결심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제과회사에 다니던 중 단골식당 인연으로 지금의 부인을 만났다. 여수가 고향으로 5년 연하인 부인의 첫모습에 반했다고 한다. “10여명이 함께 거제도로 놀러 간 적이 있는데, 혼자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넘 좋게 보여 옆에서 거들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며 “부산으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더없이 착한 모습에 결혼을 결심했다”고 수줍게 터놓는다. 결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도 시부모를 친부모처럼 모시고 자녀들 키우는 걸 보며 ‘결혼 잘했다’고 자랑하는 조 이장은 “이제부터 하나하나 보답하겠다”며 속마음을 꺼낸다.

큰 딸(26)은 전공을 살려 언어치료사로 근무하다 최근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농수산대를 졸업하고 군입대를 앞둔 아들(23)은 과수원보다 벼농사를 짓겠다고 한다. “저희 내외가 밭을 빌려 과수원 일을 하는 걸 보며 자란 아들이 과수원이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조 이장은 “군대라는 단체생활 경험이 살아가는데 좋은 공부가 될 것”이라며 병역을 마친 후에 ‘벼냐 배냐’를 결정하기로 했다.

“배농사가 사양산업이라는 주변의 이야기에 과수원을 마련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면서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께 제대로 효도 한번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며 배과수원으로 향하는 조 이장의 목에 걸린 땀에 젖은 수건에서 희망의 냄새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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