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없는 민주당은 마치 선장 없는 배와 같았다. 무엇보다도 정당의 각급 당료나 당원들에게서 집권 의지가 사라져버린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처럼만에 개인적 관심사에 충실할 수 있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당료 몇 사람과 함께 골프도 배웠고, 허경만 국회부의장(단장) 등 20여 명의 당직자와 함께 백두산 여행도 다녀왔다. 

 

또한 독일 나우만재단 초청으로 굼머스바흐(Gummersbach)에서 열린 제3세계 인권문제 세미나에 박성수 전산실장과 함께 2주 동안 참가하기도 했다.

 

시대가 DJ를 다시 요구했다. 아니, 한국의 국운이 DJ를 필요로 했다. 대통령으로서 정책과 비전을 다 갖추었고, 그동안 여기에 쏟아온 온갖 정열과 준비를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영국에서 6개월 만에 귀국한 DJ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더욱 원숙한 경지에서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 정착에 관한 강연 등 경륜 있는 행보를 하는 한편, 당내 입지도 강화해갔다.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는 DJ의 지원을 받은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어서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DJ의 정치 재개를 요청했고, 그는 이를 수용한다. DJ의 정계 복귀는 경기도지사 공천 관련한 이기택 민주당 대표와의 갈등이나 국회의원들의 요청 때문이 아니라 영국에서부터 이미 결심이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평생의 꿈, 즉 민주국가의 완성과 민족통일에의 공헌,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루어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김대중 자서전Ⅰ』, 653쪽). 대통령이 되어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기택 대표는 DJ의 대권 의지를 알아차리고 세대교체론 등을 주장하면서 DJ의 협조 요청을 거부했다. 자신에게 대권 운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당내에 들어가서 전당대회를 통해 대표를 교체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DJ는 이기택과의 결별, 즉 ‘탈당 후 신당 창당’을 결심한다. 마포 당사의 처리가 문제였다. 마포 당사는 애초 우리 쪽의 자산이었고, 당시의 시가로 40억 원을 호가했다. 그러나 탈당할 경우 법률상 소유권이 잔류파에게 귀속되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총무국장으로 이 사실을 보고하면서 처리 방법을 물었더니, 잠시 생각하다가 짧고 단호하게 “저쪽에 넘겨주라”고 답했다. 나는 여기서 DJ의 강한 대권 의지와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다. 이리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절차에 들어가는데, 나는 총무국장이었던 탓에 실무처리를 다 마치고 맨 마지막에 신당에 합류했다. 최장수(5년) 총무국장을 기록한 나는 신당에서 정무직인 연수원 부원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가을 추석 일주일 전에 모친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자식을 성공시키려고 맹모삼천의 교훈을 실천하신 어머니셨다. 단 한번도 제대로 효도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DJ는 부산에서 일정을 진행 중이었는데, 한양대병원 빈소로 위로 전화가 왔다. 

 

모친께서 (DJ의) 대통령 당선을 못 보시고 이렇게 가셨다고 말했더니, “그렇군”하고 즉답했다. 서슴없는 그 확언(確言)에서 대통령 당선에 대한 자신감을 다시 한번 읽을 수 있었다.

 

대권 4수만에 기적 같이 DJ가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회창 후보보다 39만 표 차의, 역대 대선 기록상 최신승이었고, 감격적인 승리였다. ‘DJP 단일화’가 당연히 일등공신이지만, ‘YS 키즈’라고 불렸던 충청권의 이인제(490만 표 득표)의 여권표 잠식의 공이 컸다. 

 

어쨌든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였고, 단군 이래 5천 년 만에 처음으로 호남인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일대 사건이었다. 국운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하나님은 참 공평하시다는 생각을 했다. 즉시 자민련과 공동 정권인수위(위원장 이종찬)가 꾸려졌고, 나는 정무분과 수석전문위원으로 보임을 받았다. 삼청동 교육행정연수원에서 연초 2개월간 고위 공무원들을 상대로 인수작업을 했다. 모처럼 만의 신바람 나는 출퇴근이었다. 이 기간 동안 DJ는 “결코 점령군 행세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정권 인수 작업이 끝나고 DJ가 취임한 후 나는 본래대로 당무에 복귀했다. 어느 날 문희상 정무수석한테서 전화가 왔다. 수자원공사 감사로 발령이 났으니 취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문 수석을 찾아가서 총선 출마를 위해서 경력 관리가 필요하니 작더라도 기관장으로 배려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그는 VIP의 인사발령 거부 제1호라며 난감해하면서도 일단 말씀드려보겠노라고 했다. 즉시 보고했으나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했지만, 이후 보훈복지공단 사장 발령까지 6개월이나 걸린 것을 보면, 괘씸죄가 작용되지 않았나 생각되기도 한다.

 

현재 보훈복지의료공단으로 개칭되고 기관장도 이사장으로 변경되었지만, 1998년 8월에 나는 ‘최연소 육군병장 출신의 실세 사장’(공단 직원들이 그렇게 불렀다)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3년이었지만 나는 제16대 총선을 겨냥하고 있었으므로 처음부터 임기에 관심이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