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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 - 봉황양민학살Ⅲ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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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호] 승인 2007.04.2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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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려 철야 뒷산 계곡이 피로 물들었다. 많은 비가 내려 시신을 수습하는 데 유족들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찾으려고 3일간이나 고생했었다.”(정학균)

1951년 2월 27일과 3월 2일 「전남경찰청 1일 동향보고」에 봉황지서에서 보고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월 27일, 그러니까 철야뒷산 양민학살을 저지른 다음 날 봉황에서 빨치산과 교전이 발생해 봉황지서 경찰 30명이 출동하였다.

“70명의 적군이 주민 120명을 납치하고 식량을 가지고 다도면으로 산악지대로 들어가 봉황지서 경찰 30명이 출동하였다.”(전남경찰청 1일 보고)

3월 2일자에는 “철천리 뒷산에 적 50명이 나타나 봉황지서에서 경찰 11명이 출동해 28명을 사살하고 소 1마리를 획득했다.”라고 보고 하였다.

이날 보고가 바로 철야뒷산 양민학살로 추정된다. 집단 학살을 저지르고 4일 뒤에 마치 빨치산과 교전해 28명 사살한 것으로 보고한 것으로 추측된다.

상식적으로 지서경찰 11명과 50명의 적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해 경찰은 한 명도 죽지 않고, 적군만 28명 사살했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해 보면 봉황지서와 공명이 이끄는 특동대가 2월 26일 철야 뒷산 양민학살을 저지르고 전과를 올리기 위해 4일 뒤 적군을 사살한 것으로 보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정확한 희생자 몇 명이었나?

현재까지 밝혀진 희생자는 위령비에 새겨진 철천리 26명, 송현리 3명 등 총 29명이다. 그러나 위령비문에는 ‘철천리(수각, 등내, 선동)에서 87명에 달하는 무고한 주민이 학살되었다’라고 새겨져 있다.

유족회를 만들기 전 2000년 7월 서상원씨가 처음 작성한 초기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만호정에 모인 주민 수는 수각 10명, 유촌 15명, 등내 25명, 철야 철천 3구(선동) 30명 등 총 80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중에서 약 50명을 색출해 냈다고 적고 있다. 유일한 생존자 김영태씨는 60명 정도라고 증언하였다.

“선동에서 35명 정도를 끌고 철야마을 만호정 앞에 오니까 철야주민 수십 여 명이 있었다. 모두 60명 정도가 정승렬 이장 집으로 끌려갔다.”

봉황면지에는 희생자가 약 30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국회 청원서에는 8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두 명 정도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30명 이상 차이가 나고 있다. 유족 가운데 몇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당시 현장 목격자들은 이 사건의 희생자를 약 30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날 철야뒷산까지 끌려간 사람들이 모두 마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철야뒷산 사건으로 추정되는 1951년 3월 2일자 경찰 1일 보고에도 ‘28명의 적군을 사살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죽은 사람은 다 알죠. 큰집 작은 집은 그래도 다 있으니까. 집단적으로 한 마을이라 ….”(정학균)

만호정에 모여서 철야 뒷산으로 끌려간 수는 약 40명 정도이고 그 중 운 좋게 살아난 사람이 5~6명이 살아났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희생자는 30명 정도가 맞을 듯싶다. 이날 마을 사람들이 다 모였고 1~2구를 제외하고 시체를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해 갔다.

그리고 최근 다도면 양민학살진상조사를 통해 다도면 덕림리 주민 김상기(당시 37세), 김일천(당시 31세)씨가 이곳에서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유가족이 철야뒷산에서 숨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찰이 무서워 시신을 찾아오지 못했다. 김상기씨는 덕림리에 부모가 살고 있어 그 후에 수습하였지만 김일천씨는 가족이 없어 아마 그대로 방치되었을 것이다.”(윤판상, 86세, 다도면 덕림리)

결론적으로 약 40명 정도의 철야주민이 철야 뒷산으로 끌려 가던 중 5~6명 정도가 도중에 또는 현장에서 도망쳐 약 30명이 숨진 것으로 파악된다.

유족들의 기억에 아직도 철천지 원수로 남아 있는 공명은 누구일까?

나주경찰서 경찰과 청년방위대가 10월 6일 나주를 수복하자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지 못한 빨치산 부대가 국사봉 일대로 근거지를 옮겼다.

나주를 수복한 나주경찰서는 11월 빨치산 토벌을 위해 3개 소대로 기동대를 편성해 이때부터 매일 다도인근 국사봉 일대로 토벌작전을 나가게 된다.

11월 중순에 특공대를 조직해 국사봉 일대에 주둔시키는데, 이때 공명이 특공대를 책임지는 소대장으로 발탁되었다. 토벌작전에 참여했던 공명이 소탕작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특공대 소대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

“공명은 국사봉 고지에서 빨치산과 전투에 투입되는데 아마 특공대 소대장을 한 것 같다. 다도, 장흥, 유치 등 국사봉에서 있다는 말을 들었다.”(참전경찰, 최귀현 80세)


“기동대에 근무하면서 공명과 함께 전투생활을 했었는데, 전투에 나가면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정말 용감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경으로 입대해 순경이 되었고, 국사봉에 있을 때 소대장까지 올라갔다.”(참전경찰, 최00 75세)

공명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나주경찰서에서 근무했던 참전경찰들은 잔인할 정도로 악랄했다는 사람이 많았지만, 전투에서만큼은 용감했다고 기억했다.

공명은 국사봉 일대에 주둔하면서 다도와 봉황면 주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자주 다도 민가로 내려와 밥을 먹었던 공명은 차려놓은 음식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밥상을 차 버릴 정도로 횡포가 심했다. 심지어 얼굴이 예쁜 처녀는 자신의 성적욕구를 채우는 노리개로 이용하였다.

공명이 주둔하는 그 일대 마을은 그의 세상이었다. 조금이라도 그의 눈 밖에 나면 그 자리에서 부역자로 몰아 즉결 처분하였다.

봉황에 사는 김모씨는 아들이 공명에게 죽자 원수를 갚으려고 항상 안주머니에 칼을 가지고 다녔지만 복수는 멀고 먼 길이었다.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공명은 다도면이 완전히 수복되는 1952년까지 무고한 양민들을 괴롭히고 죽였다.

봉황과 다도 주민들의 기억에 공명은 공산출신으로 경찰에 들어오기 전에 왕곡 주조장에서 일한 경력이 전부였다.

공명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전남경찰청 인사기록을 뒤져보았지만 공명이란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고향으로 알고 있었던 공산과 왕곡면에서 공명을 수소문했지만 이 또한 허사였다. 우연히 2005년 여름, 공명의 바로 옆 마을에 살았다는 이씨(75)로부터 경찰에 투신하게 된 이유와 그의 가정사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다.

1948년 나주인민항쟁이 발생했을 때 공명은 인민항쟁에 가담해 신탁통치를 반대하다 보도 연맹원에 가입되었다. 그의 처가 장성 출신이었는데, 경찰과 인척관계가 있어 1949년에 경찰 특공대에 입대할 수 있었다.

공명의 고향 또한 공산면이 아닌 동강면 운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이 ‘공명’이라는 외자가 아니라 ‘공명의’아니면 ‘공명희’둘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큰 수확을 얻었다.

이씨는 공명의 나이가 자신보다 5~6살 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자신이 고향을 떠난 1955년에 경찰을 그만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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