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무는 군인들에게 배를 수선하는 일을 각자가 찾아서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수정호에 들어오는 바다 물을 한곳도 빠짐없이 막아내라고 했다.

파도에 휩쓸린 배는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니꼬운 듯 잔뜩 찡그린 얼굴의 고회(高廻)가 큰 소리로 말했다.
 
 "겨울철 제주의 뱃길은 무척 사납습니다. 더구나 정월에 물질에 나서는 배는 아무리 급한 배라도 출항을 하지 않고 제사를 올리는데 우리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출발해서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김율(金栗)과 김진음산(金眞音山)도 나서서 말했다.
 
"제주에서 뭍으로 가는 길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뱃길을 왕래하고자 하는 이들은 잔잔한 바람이 불 때까지 몇 달씩이고 기다립니다.

전임 경차관도 한양으로 돌아갈 때 조천관이나 수정사에서 석 달간이나 기다린 후에야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비와 바람이 험한데도 그걸 참지 못하고 떠나서 이 지경 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필경 자업자득인 것입니다."
 
호송군중에서 가장 뱃길에 능숙하다는 양달해(梁達海)가 군인들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더니 고함치듯 외쳤다.
 
 "배는 이미 기울었으니 이슬을 받아 마실 물을 받은들 무엇하며 배를 수리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죽을힘을 다해 보았자 반드시 죽음뿐인 현실에서 차라리 이대로 있다가 편안히 누워 죽음을 맞이하겠습니다."

  앉아있던 다른 군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송(金松), 고보종(高保終), 박종회(朴從回), 김득시(金得時), 임산해(任山海)등도 도대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군인들은 모두가 귀에 솜을 비벼 틀어막고 있었다. 누구의 말도 전혀 듣지 않겠다는 행동표시였으며 일부는 몽둥이로 때리면서 화를 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군인들을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개인 무기로 칼과 활을 가지고 있는데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입장이다. 더 이상 살길이 없다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버린 군인들이 말했다.

  "이 배는 오래도 가고 잘도 견디는구나. 난파선은 차라리 빨리 물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으면 좋겠다."

  이미 자포자기한 군인들에게는 죽음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될 대로 대라는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최부와 총무는 할말을 잃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주에서부터 최부를 따라온 정보는 최부를 위로하듯 말했다.

  "제주사람들은 원래 마음이 선하고 착합니다. 모질고 독하기도 하지만 바다와 접해 있어서 죽음을 쉽게 여깁니다. 이미 세상이 끝나버린 듯한 상태로 생떼의 억측이오니 염려 마십시오."

군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최부는 덜컥 겁이 났다. 죽음이 코앞까지 쳐들어 온 샘인데 미리 죽어버린다니 어떻게든 이들을 달래야만 했다.

이제 물고기의 밥이 되리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할 군인들마저 이지경이 되었으니 속이 쑤시고 아팠다.

  모래를 입안 가득 씹는 맛이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하늘의 도움으로 목숨을 지킨다면 더더욱 다행이다. 군인들의 게으름과 몽매한 잘못을 나무랄 개재가 아니었다.

  최부는 먼저 배에 탄 사람들의 숫자를 파악해 보아야 했다. 지금현재 입고 있는 상복을 나주에서 가져온 막금이를 비롯한 최부의 종자(從者) 7명은 무사했다.

격군 17명과 관노 4명, 호송군 9명과 선장 등등 자신을 포함한 43명 모두가 죽은 자 하나 없이 온전하고 무사했다. 그러나 언제 죽음의 사자가 물고 갈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행이 죽지는 않았다지만 지금부터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어느 시간이 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망망대해에서 어디로 떠다니는지 모르는 정처 없는 상황이라 배는 이미 기능을 상실해서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최부는 안의를 불렀다. 그는 종6품의 벼슬아치라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었다. 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총괄하는 총무의 일을 맡은 그는 제주출신으로 리더십이 강하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총무, 나는 친상(親喪)을 당한 몸으로 이미 현직에서 물러난 사람입니다. 지금입고 있는 상복은 앞으로 삼 년 동안 입어야할 옷입니다.

그런데 무기를 소지한 군인들이 9명이나 된 대다 그들은 말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면서 애간장을 태우니 불편하기 짝이 없소. 도대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승선하게 되었소?"

안의는 다소 불편한 듯 소상하게 말했다.

  "제주목사의 특별한 배려로 경차관 가시는 길을 도와드리기 위한 예우라 여겨집니다."

뱃길이 사납고 멀어서 안전한 길을 보장하기 위한 고륙지책이었다. 남해의 사람이 살지 않는 작은 섬 뒤에 숨어있다 갑자기 나타난 해적들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을 물리칠 수 있는 군인들이 있어야만 했다.

왜구들의 노략질과 약탈은 먼저 사람들을 죽이고 난 다음 도적질을 하기 때문에 무기가 있어야만 했다. 최부의 무사한 호송 길을 위해서 동원된 군인들은 불가피한 조처였던 것이다.

  그러나 최부의 생각은 달랐다. 뱃길에 능란한 선원들이라면 적은 숫자의 동원으로도 가능할 것인데 이렇게 많은 숫자의 무장군인이 억지를 쓰며 전체의 통솔을 따르지 않으면서 어깃장만 놓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