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되자 배는 더 이상 바닷가에 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때마침 불어오는 북풍 때문에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힘에 겨운 격군들도 제풀에 꺾여 지쳐버렸다.

 의지할 곳이 없는 수정호는 일엽편주에 불과했다. 나름대로 배짱과 항해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배가 어떻게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지경이다.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봐야 해볼 도리가 없었다. 모두가 한숨만 몰아쉰다.

  "이를 어쩐단 말이냐?" "글쎄 어찌해야 좋을꼬?"

  사람들의 얼굴은 시커먼 수심으로 표정이 어두웠다. 더더구나 우박과 함께 쏟아지는 진눈개비가 옷을 적신 통에 배 위에서 걸어 다니며 이동하는 것도 힘들게 한다.

  몰아치는 강풍은 한곳에 서있을 수도 없다. 방심하다가는 바다 속으로 떠밀릴 지경이다. 이런 날씨에 바다 물 속으로 떨어진다면 흔적도 없이 떠밀려 물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집채보다 더 큰 풍랑이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내리치는 소리가 무섬증이 들게 한다. 간이 콩알처럼 작아지고 온몸을 덜덜 떨게 한다. 뱃전을 때리는 하얀 파도는 하늘로 높이 올랐다가 무너지듯 쏟아 내린다. 물소리가 귀신 곡소리처럼 들려 두려움이 앞선다.  "쏴아 쏴."

  바다는 죽고 죽이는 격전장이라도 된 듯 요란하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돛은 깡그리 찢어져 흔적도 없이 날라 갔고 뱃전은 바람에 휘날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서로 뒤엉켜 난장판이 되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찢어진 돛은 작은 헝겊조각만 놔둔 채 커다란 돛대 두개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당장에라도 넘어질듯 위태롭다. 이러다는 어느 틈에 배가 가라앉을지 모를 일이었다.

  돛 자리가 흔적도 없이 파손되었다. 다급한 상황이다. 무슨 수를 써야 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선장이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돛대를 잘라 버려라."

  권산의 명령이 떨어지자 초근보가 선실아래에 있는 창고로 달려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왔다. 키가 큰 돛대가 오히려 배를 전복시킬 염려가 크므로 이를 잘라버리고자 한 것이다. 쿵쿵대는 도끼소리가 들리는가, 했더니 어느새 돛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지직 꽈당."  "쿵쿵 찌지-끈."

  고이복은 바닥에 누운 돛대 두개를 끈으로 묶어 선미에 단단히 붙들어 매달았다. 배의 뒤쪽을 때리는 파도를 조금이라도 죽이는 방법은 이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한낮이 되자 비는 조금씩 멎었지만 동풍이 크게 일어나더니 수정호가 갑자기 로링을 심하게 하면서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뒤집어질듯 위험하다. 금방이라도 넘어질듯 물속에 가라 안다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기우뚱거리는 배가 저 혼자 요동을 친다.

수정호는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배가 당장에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위태하다. 지금부터는 배가 움직이는 대로 놔둘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바람에 떠밀리던 배는 순식간에 서해 가운데로 동동거리며 빨려 들어갔다.

  배 안에는 대장정이 무려 43명이나 있었지만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것이었다.

  아-아, 안타까운 수정호여!

  초공(梢工 )김고면이 키 잡은 손을 들어 동북쪽 멀리 검게 보이는 섬을 가리켰다. 길쭉한 것이 영락없는 탄환 같다.

  "아마도 흑산도(黑山島)인 듯 합니다. 제가 많이 다닌 뱃길이라 훤히 아는 곳입니다. 여기를 지날 때는 사방이 터져서 수평선만 보이고 바다와 하늘이 붙어있는 곳에 하나의 검은 점으로 보이는 저곳은 틀림없이 흑산도일 것입니다."

  작은 어선을 몰았던 초공은 제주에서 출항하면 보통 3∼5일쯤이면 흑산도에 이른다고 자신의 경험담을 말했다. 흑산도는 수로로 900리고 둘레가 35리다.

  그러니까 흑산도는 최부의 고향 나주목 소속의 섬으로 어종이 풍부해서 고기잡이가 제일 잘되는 섬이었다.

  한반도와 중국 절강지역을 연결하는 해로의 기착 지점이자 지친 어부들이 편하게 쉴 수 있는 어머니 품속 같은 항구가 흑산도였던 것이다.

흑산도를 지나친다면 가도가도 섬 하나 없는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듯 끝없는 바다만 있을 테이니 걱정이 태산이다.

 배의 방향을 바꿀 수만 있다면 될 터인데 속수무책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날씨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며 비극적으로 변해가자 최부는 선실에서 나왔다. 당장 마실 물이 한 컵도 없었다.

  먹을 물뿐만이 아니었다. 세탁할 물이나 허드레로 쓰일 물도 단한 방울도 없었다. 최부는 총무 안의(安義)를 불렀다.
 
 "총무, 물을 만들어야겠소. 생활용수는 말할 것도 없고 당장 마실 물이 단한 방울도 없구려."
  "예 당장 마실 물부터 증류해서 만들어 내도록 하겠습니다."
 
 총무는 관노들을 모두 불러냈다. "이리 오너라. 빨리 오너라."
 
 권송(權松), 강내(姜內), 이산(李山), 오산(吳山)이 아래 선실에 있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갑판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바다 물을 부은 다음 불을 지핀다. 수증기가 올라오면 대롱 속으로 지나가게 한다.
 
 증기가 지나가는 대롱을 차디찬 헝겊으로 감아 온도를 내려주면 안에 물방울이 작은 방울토마토열매 맺듯 방울지며 달라붙고 이를 약간 기울이면 아래로 흘러내려 모이게 된다. 순수한 증류수인 것이다.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만사휴무였다.
 
 궂은 날씨로 인해 배가 파도에 따라 불규칙하게 움직거리기 때문에 솥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먹을 물은 고사하고 취로(取露)장치를 설치하기도 어려웠다.
 
 선실의 밑창 곁에 있는 창고에는 취로장비로 긴 장대와 가마솥 등이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것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사용하려했지만 비틀거리며 너울대는 배로인해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불을 피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애를 썼지만 결국 단한 방울의 물도 걸러낼 수 없었다. 선실의 바닥에 앉아있기도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