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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껍질 두개골 원칙》 브리 리(지은이)
이철웅 편집국장  |  njt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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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호] 승인 2020.05.24  23:3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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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에게 일그러진 사법 정의

퀸즐랜드 지방법원에서 재판연구원으로 일하던 책의 저자 ‘브리 리’는 친족 성폭력부터 아동 성 착취물까지 수많은 성범죄 사건들을 다루면서, 정의구현을 기대하는 법정에서조차 피해자가 외면 받고 고통받아왔음에 분개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심리적 불안이 어릴 적 겪은 성폭력 피해의 트라우마 증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낙담과 분노를 오가던 브리 리는 결국 형사 소송의 고소인으로서 성폭력 가해자와의 법적 싸움에 돌입한다. 이후 힘겨운 재판 과정 속에서도 그는 어딘가에서 숨죽여 울고 있을 또 다른 피해자들을 떠올리며 연대감과 정의감을 잃지 않았고, 끝내 어두운 터널 속 작은 불빛을 향해 꿋꿋이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되찾기 위해 긴 여정을 헤쳐 나간 한 여성의 법정 투쟁기이자 성장기이다.

   
 
책 제목 ‘계란껍질 두개골 원칙’이란 누군가의 머리를 가볍게 한 대 쳤는데 두개골이 계란껍질처럼 얇아 사망했다면, 머리를 가격한 자는 그 사망에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피해자가 얼마나 연약한지와 상관없이 가해자(피고인)에게 모든 피해의 책임이 있다는 법리다. 저자 브리 리는 영미법상의 이 원칙을 바탕으로 성범죄를 둘러싼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나아가 성 인지성이 결여된 무죄추정의 원칙만으로는 성폭력 사건의 핵심에 근접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한다.

저자는 로스쿨을 졸업한 뒤 재판연구원이 되어 성범죄 공판을 주로 맡는 판사님을 도와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는 자신이 성범죄 사건을 더 이상 중립적, 객관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 자신부터가 여성이자 성폭력 피해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의붓딸 성폭행, 아동 성 착취물 소지, 데이트 폭력, 지인 강간 등 하나같이 끔찍한 사건들과 그 당사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그는 피해자의 입장에 더욱 깊게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1부는 이같이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성범죄 사건의 재판들을 다룬다. 저자는 가해자에게 너그럽고 피해자에게 엄격한 사회적 시선과 배심원단의 평결에 분노하고, 사법적 정의가 가닿지 못하는 어둡고 일그러진 현실에 좌절한다.

이렇듯 지방법원의 성범죄 재판을 다루면서 브리 리의 불안 증세는 점점 커져가고, 그 증상은 폭식, 폭토, 자해와 같은 극단적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던 중 그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자신의 낮은 자존감과 극심한 우울감이 성폭력 피해자의 전형적 증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자가 심어놓은 어두운 존재가 자신을 안에서부터 좀먹어왔음에 절망하지만, 그는 살기 위해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브리 리는 깊은 기억 속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10여 년 전 그날의 사건을 끄집어내 자신을 성추행했던 지인을 법정에 세운다. 2부는 저자가 경험한 바로 이 법적 싸움을 그린다.

형사 소송을 진행하면서 브리 리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경찰의 행동과 공판 절차에 낙담하기도 하고, 가해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로 공포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 꿋꿋이 지난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무엇보다 2년이 넘는 재판 과정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해준 건, 또 다른 피해 여성들과의 연대감이었다.

브리 리는 자신이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다른 여성들이 승리할 가능성 또한 높아질 거라 믿었고, 자신의 투쟁 역시 이전에 법정에 섰던 여성들 덕분에 가능한 것임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자신을 법정에 불러 세웠으며 자신의 싸움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임을 확신한다. 법원의 재판연구원이자 성폭력 피해 생존자로서 성범죄를 둘러싼 사법 제도의 모순과 정의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물으며 앞으로 나아간 한 여성의 용감한 회고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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