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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 - 문평면 양민학살형 깜박하고 아주머니 따라가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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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호] 승인 2007.03.16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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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집 아주머니가 해붕이 손을 잡고 저수지 아래 주막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주막집 주인은 양씨로 해붕이와 먼 친척지간이었다. 형이 밭에 있다는 것을 깜박 잊어버린 해붕이는 주막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마을입구에 갔더니 사람들이 마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대충 아침을 얻어먹고 마을로 올라가는데, 그때서야 형이 생각났다. 형이 기대어 있던 밭으로 가보았더니 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사람들은 밭에 널린 시체를 수습해 가묘를 쓰고 있었다.

형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데, 집 옆에 샘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샘가에 가보았더니 물이 나오는 우물에 머리를 넣고 죽어 있는 사람이 보였다. 바로 형이었다. 언덕 밑에서 우물까지 200미터가 넘는 거리인데, 목이 말랐던 형은 기어서 우물까지 올라와 물을 실컷 마시고 죽은 것이다.
 
눈물도 나지 않고 그저 정신이 몽롱할 뿐이었다. 형이 밭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마을로 내려간 자신이 미웠다. 우물가에서 죽은 형의 시신은 동네 사람들이 우물가 근처에 대충 흙을 덮어 묻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동생의 시신은 손 쓸 수가 없어 밭에 그대로 두었더니 파리가 끓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3일이 지나자 해붕이 가족 시신을 제외한 나머지 40여구는 유족들이 모두 수습해갔다.
 
다음날 작은아버지가 나주를 지나가다 집을 들려 가족들의 시신을 대충 흙으로 덮어 줄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와 해붕이는 엄마와 누나, 아버지 시신을 흙으로 조금 덮고 표시를 해 두고 내려왔다. 동생의 시신은 아예 찾지도 못한 채.
 
며칠 뒤 돌아오겠다며 작은아버지는 무안으로 떠나고, 해붕이는 다시 저수지 아래 난쟁이 집으로 갔더니, 마당에 집에서 키우던 소가 말뚝에 묶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에게 빌려 줬던 소였다.
 
사건이 일어난 그날 지금의 사슴목장 아래 밭에서 소를 빌려간 동네 사람이 쟁기질을 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불이 나고 총소리가 들리자 소를 몰고 뛰기 시작하였다. 지게를 지고 소를 몰아 동네 아래로 도망을 치고 있는데, 마을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다행이 지게 등발에 총알이 박혀 살았던 그 사람은 이틀 후 마을에 올라 와 '천운'으로 살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마을에서 100미터 거리도 안 되는 우리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는데, 동네에서 총소리가 들려. 그래서 경찰 눈을 피해 조심조심 유전마을로 내려가는 중에 집들이 불길에 휩싸이더라고.

그때부터 소를 몰고 뛰기 시작했는데, 운 좋게 총알이 지게에 맞아 살았어. 해붕이 집에서 빌려 온 소라 밭에다 나두고 올수가 없어서 소를 몰고 뛰었던 거야."
 
난쟁이 집에서 며칠을 기거한 해붕이는 작은아버지를 따라 무안으로 가서 친척집에서 두해정도 살다 고아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충격으로 그는 날씨가 좋지 않으면 친척집을 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그래서 친척집을 나와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아원에서도 못 견디고 나온 해붕이는 아이스케끼 장사에서부터 머슴살이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경찰청 작전일지에 동막리 토벌작전 기록

 1951년 5월(음력). 「전남경찰청 1일 작전일지」에 문평면 동막리 토벌작전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나주군 문평면 동막골 지구에 잠복(潛伏) 중인 불집산 공비 200여 명(무장 50명, 비무장 50명)을 토벌코자 100명으로 토벌작전을 벌여 사살 7명, 포로 20명, 노획 소총 20정의 성과를 거두웠다" (전남경찰청, 제9장 全南警察의 建國, 601p)

 정확한 날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음력 5월이라는 것과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이날 토벌작전이 바로 동막골 소개작전인 듯하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불집산에 무장한 공비 50명은 동막골 인근에 주둔해 있던 빨치산 부대로 여겨지며, 비무장 50명은 동막골 주민을 지칭한 듯하다. 작전일지를 통해 이날 100여 명의 경찰병력이 동막골에 투입되어 빨치산 7명을 사살하고 마을로 내려 듯하다. 

"동막골 인근 나주방면 쪽에 빨치산 부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며칠 전 이 부대가 나주 어느 지서를 습격한 일이 있었다. 나주지서가 불에 타고 아마 경찰 사상자도 발생했을 것이다. 이 일로 화가 난 경찰이 이날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고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죽인 것이다."(이정호, 당시 12살, 문평면 동막골)

 이정호씨는 이날 노안으로 피난해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동막골 집에서 창고에서 곡식을 말리기 위해 끄집어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집 앞에서 아버지는 사랑채 뒤에서 바쁘게 일손을 놀렸다.

이씨의 집은 웃전마을로 동네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날 밭으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따라오던 경찰 2명이 하필 이씨의 집이 있는 길로 내려와 마당에서 일하고 있는 작은아버지를 발견하고 마을로 끌고 내려갔다. 다행이 이씨 아버지는 집 뒤에서 일을 하고 있어 목숨을 건졌다.
 
이날 일가족이 몰살되어 노인과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군경가족이 아닌 마을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난 오만순 할머니는 장애인이어서 살수 있었다. 지금도 동막골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는 그때 일을 아예 생각하기도 싫다며 입을 다물었다.

"우리 옆집에 양씨 가족이 살았는데, 딸이 내일 모래 시집간다고 준비를 했어. 그 처녀가 이쁘게도 생겼는데, 머리를 따고 마을을 돌아다녔거든..
우리 윗집 오맹근 가족이 6명인가 8명인가 기억이 가물가물 한데, 모두 이날 죽었어.."(오만순, 여, 86, 문평면 동막골)

 이날 숨진 희생자는 약 40-45명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밝혀진 희생자는 다음과 같다,
아이를 업은 할머니에서부터 오맹근 일가족 6-8명(오삼중, 오정렬 등 4형제), 양해붕 가족 5명, 정천기(당시 40세 추정) 일가족 5-6명, 유하봉 일가족 5-6명, 윤신홍 아버지, 이승해 전 부인, 이용기(33), 유중일씨 부모 등이다.
 
현재까지 희생자는 30여 명이 이리저리 수소문을 통해 밝혔지만 일가족이 모두 사망하고, 당시 현장 목격자가 없어 희생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날 43명이 희생한 것으로 마을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동막골에서 집단학살을 저지른 경찰부대는 유전마을로 2차 학살을 저지르기 위해 내려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는데 총소리가 들려. 아마 밥을 먹기 전이었어. 우리 집도 다시로 피난 갔다가 들어 왔는데, 총소리가 들리니까 큰 아버지가 소를 몰고 다시로 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평풍산에서 피난을 못 가게 경찰이 총을 쏘는 거야. 그래서 우리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내가 마을에 갇히게 되었어."(서호현, 당시 11살, 문평면 유전마을)

 동막골에서 내려 온 경찰은 산에서 잡아온 빨치산인지, 아니면 동막골 주민인지 알 수 없지만 한 명을 데리고 유전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전부 집합시켰다. 그리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데려온 사람을 사살했다.

"경찰 특공대 1개 중대인 것 같은데, 한 100명 가까웠어. 집에서 빨리 안 나온다고 대학촌 옆에서 노인 이씨를 총으로 쏴서 죽이니까 손자들이 울어.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는 아들 부모도 없는 막된 놈들이다'면서 마을 사람들을 죽이려고 해"(서호현)
 
 집에서 늦게 나온다고 노인 이씨를 죽인 경찰은 주민들을 밭으로 모이게 한 후 동막골에서처럼 집단학살을 저지르려는 순간 저쪽에서 경찰 한명이 뛰어오면서 소리쳤다.

"방금 연락이 왔다. 마을 사람을 죽이지 말라"

동막골에서 주민들을 죽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문평지서 제갈덕수 지소장이 한숨에 달려와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유전마을 주민들을 살린 제갈덕수 지소장은 노안면 출신으로 그 후 문평을 오가며 이 사건과 관련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막골에 은신해 있던 빨치산 부대를 토벌한 경찰특공대는 마을로 내려와 군경 가족을 제외한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하고 함평 불갑산으로 향했다. 이날 경찰은 빨치산이 식량과 보급물자를 확보할 수 없도록 집을 모두 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43명이 숨진 동막골 집단학살 현장은 크고 작은 돌이 많아 일명 '돌무덤'으로 불러졌으나, 1980년경 경지정리로 인해 돌 무덤이 사라지고 논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9월과 11월에 나주경찰서 문평지서에 극동리와 운봉리 등지로 작전을 나간 것으로 전남경찰 1일보고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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