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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
이철웅 편집국장  |  njt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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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호] 승인 2019.05.03  18: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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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철웅 국장
연말마다 교수사회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발표한다. 중국 고사의 표현 중에 한 해를 꿰뚫는 촌철살인을 고른다. 아직 이른 감은 있지만 나주시 올해의 키워드 사자성어(?)를 꼽아본다면 고사에도 없는 ‘내로남불’일 것 같다. 요즘 진영으로 갈린 지역사회 특정밴드의 행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 ‘내로남불’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1996년 15대 총선 직후 당시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당인 신한국당의 ‘의원 빼가기’와 관련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가 맹공을 퍼붓자 ‘내로남불’로 응수했다. 박 전 의장은 “내가 창작한 말”이라고 했다. 원작자가 누구이든 23년 전 그가 그 말을 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에게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기도 하다.

세월은 흘러 2019년 나주. 정치권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내로남불이 지역사회, 특히 특정밴드 사이에서 도를 넘고 있다. 물론 몇몇 사람에 불과하다지만 특정밴드에 가입해 있는 회원 수를 감안해볼 때 자칫 지역 간 계층 간 봉합할 수 없는 사태로까지 이어질 소지가 다분하다는 걱정이다. 아직까지 대부분의 특정밴드 회원들은 내로남불식 소통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하면서 ‘찻잔 속의 태풍’쯤으로 여기고 있지만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타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상대방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찾으려는 마음, 즉 공감이야말로 양비론에 의한 분열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단어다.  그러나 요즘 지역사회 특정 밴드를 접속해 보면 그 같은 공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공감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화돼 ‘내 편과 네 편’의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편은 지키고 네 편은 버린다’는 이기적 욕망이 공감이라는 미명아래 횡행하고 있다. '내 편이 하면 로맨스, 네 편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식의 전투를 방불케 하는 언행이 난무하는 밴드를 볼 때면 그런 생각에 빠져든다.

이 같은 내로남불의 저변에는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치장한 ‘공감’이라는 ‘동류의식(同類意識)’짙게 깔려있다. 이유 불문하고 내편의 고통과 어려움에만 공감한다. 그래서 어떤 궤변을 동원해서라도 자기편은 옳고 상대편은 그르다. 공감이라는 것은 타인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작금의 지역사회 특정밴드에서는 그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생각이나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 편의 누군가로 한정된다. 누군가가 내 편으로 분류된다면 그는 내 공감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남불’이다. 이것이 현재 지역사회 몇몇 특정밴드의 현주소다.

직업 특성상 수시로 지역사회 여러 밴드를 접속하고 있는데 특정밴드 몇 군데를 보면 이곳이 밴드인지 전쟁터인지 분간이 어렵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건전한 소통은 가뭄에 콩 나듯 하고 공감을 앞세운 ‘나는 언제나 옳고 너는 언제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진영논리가 판을 친다.

현재 지역사회 특정밴드를 장식하고 있는 내로남불은 어쩌면 사회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방은 다 틀렸고’ ‘자신들은 다 옳다’는 상황논리로 변명하지만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다 옳거나 다 틀렸기 쉽다. 더욱 문제는 서로 분열된 집단 내에서 상대방에 대해 조금이라도 동의하거나 이해하려는 모습도, 자기 집단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목소리도 전혀 부재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너 죽고 나 살기다’ 이런 상황에서 밴드의 근간인 다양성 그리고 토론과 합의, 양보와 협력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넛지(Nudge)〉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캐쓰 R. 선스타인은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라는 책에서 이러한 집단의식의 모습을 '집단극단화'로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유사한 집단 속에 들어가면 극단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극단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내부 다양성은 저하되며, 나아가 상대집단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고 말한다. 그는 “집단 내부에 동일한 성향의 정보가 쏟아지고 사람들은 사회적 평판을 고려하여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일반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일수록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며 “정보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 공간은 더 신속하고 폐쇄적인 정보순환을 가능하게 하여 집단극단화를 더욱 가속화시킨다”고 우려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내로남불을 인간의 본능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내로남불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아 붕괴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발동하는 방어 시스템 중의 하나인 것이다. 지금 지역사회의 특정 밴드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본인의 경험이나 일반적인 사회현실에 대해 개인의 의견이나 주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소통의 공간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이 답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지역사회는 갈수록 갈등의 깊은 골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상대편을 희생시키고 내 편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나주정의’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할 것이다.
 
성경을 보면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 앞에 끌고 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를 묻자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말하자 모두들 슬금슬금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자 예수가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유대인 율법으로는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도록 돼 있었다. 과연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나와 내 편을 예외로 하지 말고 타인들과 똑같이 취급해야 한다”는 임마누엘 칸트의 말이 새삼스럽다. 칸트에게 가장 사악한 건 신분사회에서처럼 자기나 자기편을 예외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로남불에는 나와 내 편은 늘 옳고 정의롭다는, 그래서 행동준칙에서 예외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우생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 내로남불은 불가피한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한계다. 우리는 내가 한 사랑이 결코 아름다운 로맨스가 아닐 수도 있고, 상대도 동일한 실수를 할 수 있는 똑같은 존재임을 인식해야한다.

타인의 행위에는 서슬 퍼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스스로에게도 엄격한가. 나를 재는 잣대와 남을 재는 잣대가 따로 있지 않은가, 우리 모두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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