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 이철웅 국장

“할아버지 손목 잡고 나도 함께 가면 얼마나 좋겠소”. “내가 곧 갈게요. 내가 금방 못가거든 할아버지가 데리러 와요. 데리러 오면 내가 할아버지 손잡고 그렇게 갑시다”.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 나오는 89세 강계열 할머니 대사의 일부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어느 강원도 산골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76년이라는 세월을 해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온 조병만(98세) 할아버지와 강계열(89세) 할머니의 연인 같은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노부부는 언제 어디를 가든 같은 빛깔의 ‘커플 한복’을 입고 두 손을 꼭 잡은 채 다닌다. 꽃 피는 봄에는 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주고, 여름엔 개울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가을엔 낙엽을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는 매일이 신혼 같은 백발의 노부부.

평생을 같이 할 것 같았던 남편도 어느덧 기력이 약해지고 밤새 기침에 시달리는 날이 많아  진다. 생로병사의 순리에 따라 할아버지는 마침내 할머니를 남겨둔 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강을 건너고 만다. 한번 건넜다 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그 강을 두고 할머니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애절하고 애통하다.

JP(김종필) 부인 박영옥 여사의 별세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실사판 같아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크다. 입버릇처럼 ‘사랑해요’ ‘고마워’라는 말을 서로에게 건네며 살아왔던 영화 속 황혼의 노부부. JP와 부인 박영옥의 삶도 그랬을 성 싶다. 박영옥 여사의 별세로 JP의 뜨거웠던 아내 사랑이 아내 죽음 못지않게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노정객(老政客)은 아내의 영정 앞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김종필(89) 전 국무총리는 22일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부인 박영옥(86) 여사의 빈소에서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가 이렇다 할 보답도 못했어, 나를 남겨 놓고 먼저 세상을 뜨니 허망하기 짝이 없네”라고 했다. 김 전 총리는 이 총리(이완구)에게 “난 마누라하고 같은 자리에 눕고 싶어서 (가족 묘지를 따로 마련하고) 국립묘지 선택은 안 했다”며 “거기 나하고 같이(아내가) 나란히 눕게 돼. 먼저 저 사람이 가고 그 다음에 언제 갈지…”라며 “곧 갈 거예요, (제가) 외로워서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조선일보)

JP는 부인이 지난해 입원한 후 매일 병원을 찾아 아내의 옆을 지켰다고 한다. 부인의 병상을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JP는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오른 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에 의지했지만 부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해온 사실도 알려졌다. JP는 의료진이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리자 모든 주위를 물리친 뒤 고인의 임종을 지켰으며, JP가 부인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자 곧이어 부인이 숨을 거뒀다고 전해졌다.

JP의 지극한 아내 사랑을 접하고 문득 추사 김정희의 ‘도망(悼亡)’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어떻게라도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빌어/ 다음 생에는 그대가 남편 되고 내가 아내 되어/ 나는 고향 집에서 죽고/ 그대 천 리 밖에서 소식 듣고/ 그대 이 내 비통한 심정을 알게 하리라.”

추사가 유배지 제주도에서 한양에 살고 있는 부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인의 죽음을 애도한 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비통함을 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죽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중매쟁이)에게라도 빌어 다음 생에는 입장을 바꿔 태어나, 아내로 하여금 추사의 당시 비통한 심정을 알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추사의 절절한 아내 사랑이 묻어난다.

JP나 추사의 아내 사랑은 ‘형이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사 이별이 없다면 사랑이 이토록 숭고하고 애통할 수 있겠는가.

노국공주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고려의 멸망을 자초하고 말았지만 역사상 가장 절실한 로맨스를 보여준 공민왕.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마릴린 먼로의 남편 디마지오의 ‘이제 그녀의 곁으로 갈 수 있겠다’고 한 유언이나, 왕비 뭄타주가 죽자 지상최대의 타지마할 궁전을 만든 사자한 등은 사랑하는 여인을 목숨처럼 아꼈던 사람들이다.

아직까지 아내를 목숨처럼 아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들의 사랑 전부를 헤아릴 수는 없지만, 10년 전에 비해 황혼 이혼이 10배가량 증가했다는 통계이고 보니 과연 부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한지를 알 것도 같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남녀가 처음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을 때 가장 소망하는 사항일 것이다. 김종필 박영옥 부부 두 사람 또한 그러지 않았을까? 진짜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서로의 곁을 지켜왔던 김종필과 박영옥. 부인 박영옥의 죽음으로 64년을 한께 했던 이승에서의 그들의 사랑이 결국 막을 내렸다.

이혼은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역시 선택의 기준은 사랑이다.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생로병사의 순리에 순응하는 그날까지 서로의 곁에 남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며 그 강을 건너갈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을 서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랑이 절실하다. 황혼 이혼이 늘어가고 있는 이때 JP의 망부가(亡婦歌)에 가슴 뭉클해지는 것은 비단 나의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