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석 앞에 김씨가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삼십 여명이 나란히 섰다. 목소리를 높여 김씨가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용왕님께 비나이다. 우리들의 배를 지켜 주십시오. 뱃길이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비나이다.”

최부일행이 사무인계를 준비하는 사흘 동안 선원들은 밤낮으로 출항준비를 해왔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고 작은 거룻배에는 물통을 두개나 실었다. 비상용 식량도 넉넉하게 실었다.

제주에서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쌀도 실었다. 제주목사가 배려해준 덕분이다. 사실은 준비랄 것도 없는 편이다. 이틀이면 땅 끝에 닿으니 경차관 일행을 내려주고 되돌아오면 되는 단순한 뱃길이다.

최부와 그의 일행들이 짐을 챙기고 보따리를 꾸렸다. 어수선한 저녁인데 말 발굽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경차관님 계시오?”
“누구 시온데 늦은 밤에.” 
“고인에게 명복을….”

제주판관(判官)으로 근무하던 정전(鄭詮)이 뒤늦게 조문을 온 것이다. 빨리 가지 못한 최부의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오직 떠날 시간을 그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는 많은 생선을 가져왔다. 나주로 가는 뱃길에 먹으라고 했다.

이제 식량뿐만 아니라 고기반찬까지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가는 뱃길의 날씨만 좋다면 만사가 오케였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정의현의 훈도(訓導) 최각이 많은 향교 학생들과 같이 찾아왔다. 훈도관이라고도 했던 최(崔)교관은 문장실력이 대단해서 그의 제자들은 월등하게 우수한 시작(詩作)을 할 수 있는 자들로 향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곤 했던 것이다.

향교의 지도교사를 훈도라 했는데 그는 최부와 같은 종씨라며 매우 친하게 지냈던 인연이 있었기에 조문을 와준 것이다.

“경차관님, 인명은 재천이라 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삼가 조의를 전합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인사를 받는 최부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걷어지지 않았다. 최부의 걱정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초상을 칠 만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의 어머니는 연로하셔서 어렵고 여동생은 또 너무 어려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분들의 가난한 얼굴이 오버랩 되어갔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면서 비가 오다 말다를 계속했다.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구먼.”

오락가락하는 날씨를 원망한다. 잘듯 말 듯한 날씨가 속을 태운다. 우박처럼 눈발이 뭉쳐 함께 쏟아졌다. 제주향교의 늙으신 학장(學長)김존려(金存麗)가 왔다.

향교는 제주에서 필요한 인제들을 양성해내는 국가교육기관으로 향교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자들은 초시를 치루고 시험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불렀다.

진사들을 지방의 초급관리가 되기도 했으며 일부 우수한 성적의 젊은이들은 다시 한양의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했다.

조선의 엘리트 인재를 양성하는 곳은 성균관이 유일한 곳으로 이곳을 마친 자들만이 과거를 보아 벼슬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학장은 최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집을 나서면서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최부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

“경차관님! 며칠만 더 기다려서 바다가 잔잔해지면 그때 배를 타시지요. 제주에서 정월 한달은 어떤 배도 바다에 나가지 않습니다. 정월 바람은 너무 강하고 무섭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이 나이를 먹어 제주날씨를 잘 안다면서 한사코 떠나는 것을 말렸다. 그는 태어나서 예순이 넘도록 제주를 단 한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면서 이런 날씨에는 물질뿐만 아니라 뱃길도 금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제주에서는 정월 한달은 ‘신구간(新舊間)’이라 해서 이때를 기다려 집중적으로 이사를 한다. 궂은 날씨 때문에 바다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거친 이사 일을 서로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소 이리오소. 바다에 못 갔으니 우리 집 이사나 도와주소.”

이 무렵에는 쉽게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커다란 장정네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월의 바다날씨가 맵고 사납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제주의 영산 한라산이 흐리거나 오늘처럼 비가 저적거릴 때는 세찬 바람을 동반하며 더더구나 눈발까지 겸하므로 필연적으로 강풍이 몰아친다고 했다.

그래서 제주에서 정월 한 달간은 배들이 바다에 나가지 않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자리한 제주도에서 눈발이 몰아칠 때는 반드시 성난 파도가 친다고 했다. 그는 주자 문공가례(文公家禮)를 들먹이며 말했다.

친상(親喪)을 당해 집으로 떠나갈 때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친상의 소식을 듣고 나면 누구라도 슬퍼하며 서둘러 가게 된다고 했다. 아무리 급하다 하더라도 몸에 병이 나고 상처를 입게 되면 하루에 백리를 간다지만 집에는 가지 못하고 만다. 결코 서둘지 말라는 의미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올릴 때는 지극한 정성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하루 백리를 가더라도 어두운 밤에는 가지 않으며 아무리 슬프고 서럽더라도 너무 울어 마땅히 해로움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큰 바다를 건너가는 길에서는 조심해야하며 물길을 멀리 내다보며 살펴야 한다고 했다.

 “예, 살펴 가겠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조급해진 최부지만 바다가 잔잔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성난 파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아무튼 급하더라도 바다를 건너려면 배를 타야하는데 답답하기만 하다.

 ‘이를 어쩐 담….’

발만 동동 구르는 최부의 걱정하는 가슴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수정호는 출항준비를 마쳤지만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숨이 막히는 답답함이 엄습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