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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나주양민학살 - 세지동창 양민학살Ⅶ11사단 20연대 5중대 부대원 연구
신광재 기자  |  sjs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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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승인 2007.02.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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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중대 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만주 연길에서 태어나 충청남도 서산에 살았다. 1950년 1월 5일 중위계급으로 5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50년 10월 24일 대위로 승진하였다.

1951년 1월 23일 세지 동창교 양민학살을 저지르고 3일 뒤, 무슨 이유에서인지 20연대 병기장교로 전출된다.

1951년 1월 23일부터는 후임 중대장으로 이영오 중위가 5중대를 맡게되면서 그 이후 학살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동창 양민학살을 저지르고 몇 달 뒤 6·25전공으로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권준옥은 1970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제대 후 충주비료공장에 근무하다 1981년 권영구로 개명했으며, 1982년 퇴직 후 낚시가게를 경영하였다. 1991년 62세로 사망하였다. 
 
1960년 6월 23일 제35회 국회임시회의 속기록 제42호를 비롯해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위원회 속기록』등 국회의 모든 기록은 권준혁이라고 적고 있다.
 
양민학살에 적극적인 '하중사'란 하사관이 있었는데 권준옥 중대장의 묵인 하에 잔인한 학살을 자행하여 다른 부대로 이동하였다. 전출 후 좌익 또는 간첩으로 몰려 체포돼 처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격포 소대에 조만개 하사가 있는데, 부산출신이다. 중대장의 당번병인 김일호 일등병이 있다. 1931년생으로 당초에는 제주도 북제주군 한경면 조수리 1578번지 출신이었으나 1999년 제주시 연동 295의 51번지로 이사해 거주하고 있었다.

19살 때인 1950년 8월 입대한 후 한림초등학교에 신설된 제주도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다음 5중대로 배속되었다. 종교인이었던 김일병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함평 양민학살사건을 증언하였다.
 
이외에 김공원(제주도 현경면 금등리 수장동 거주)과 이평문(제주도 한림읍 귀덕리 거주), 양영언 일병(제주도 애월읍 수산리 거주), 이동휘(제주도 거주), 홍순흥(제주도 거주) 등으로로 1950년 9월 김일호와 함께 소집되어 한림초등학교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경남 삼랑진에서 제5중대 제3소대에 배속되었다. 함평양민학살 때 5중대 병력은 89명이었다.
 
5중대에 제주도 출신이 많았던 이유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제주도 청년들이 앞다투어 군에 입대하였다. 4·3사건을 경험한 이 지역 주민들은 언제 갑자기 집합하여 이유도 모른 채 총살당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총알을 피할 수 있는 전쟁터가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도가 당시 얼마나 공포의 땅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빨갱이를 잡는데 앞장선 사람이 어째서 빨갱이일 수 있느냐는 항변이나 자기보호일 수도 있었다. 


동창양민학살 진상조사 추진위원회와 유족회 활동

1998년 6 27 지방선거에 출마한 이상계 나주시의회 시의원 후보가 세지양민학살사건과 관련한 진상규명을 선거공약을 내세워 진상조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해 7월 2일 세지면 회의실에서 시의원으로 당선된 이상계 시의원을 비롯해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상규명을 위한 임시모임을 처음 갖고 향후 추진방향에 대해 논의하였다.
 
7월 14일 지역 사회단체 대표와 원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37명을 세지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으로 임명하고 이상계 시의원을 위원장으로 추대해 추진위원회가 창립되었다.

이어 7월 18일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10월 4일에는 유족회 창립총회를 열어 선병수씨를 유족회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그해 12월 28일 나주시의회 제36회 정기회 본회의에 세지동창양민학살 진상조사 요구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며, 1999년 2월 25일 세지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를 국회에 청원하게 되었다.
 
그 후 위원회는 1999년 2월부터 12월까지 생존자들의 증언을 비디오로 녹화하는 등 본격적인 양민학살 진상조사에 나섰다. 2000년 1월 18일 동창교 다리 밑 주차장에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집단학살 제49주기 합동위령제가 49년만에 처음 열렸다.
 
2000년 12월 27일. 199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제16대 국회에 진상조사 요구안을 청원했으며, 매년 2월과 3월에 양민학살 합동위령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2005년 11월 25일 동창교 다리 위에 양민학살 위령비를 건립하고 위령제를 봉행한 추진위원회는 2006년 12월 6일 위원회를 해산하고 모든 권한을 유족회에 넘겼다. /신광재 기자

  세지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동기 및 추진일지

    1998년 6·27선거시 이상계 시의원후보가 세지양민 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진상조사가 시작됨.
    1998년 7월 2일 진상규명을 위한 임시모임 개최 추진방향 모색과 관련자 10명의 증언 청취 (세지면회의실 20명 참석)
    1998년 7월 14일 세지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 개최
     (이상계게위원장 및 위원 37명 구성, 세지면 회의실)
    1998년 7월 18일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결의대회 개최
     (세지면복지회관 200명)
    1998년 10월 4일 유족회 창립총회 개최 (회장 선병수외 38명)
    1998년 12월 28일 나주시의회 제36회 정기회 본회의 진상조사 요구안 만장일치 가결
    1999년 2월 25일 세지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국회청원
    1999년 2월 ~ 12월 전남 순천시, 영암군 등 방문 생존자 8명 증언 청취
    2000년 1월 18일 세지양민학살 희생자 제49주기 합동위령제 실시
     (동창교 밑 주차장 1,500명)
    2000년 6월 21일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심포지움 참석 경과보고
     (서울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이상계 위원장)
    2004년 9월 7일 위령비 건립 대책회의 개최
    2005년 10월 28일 위령비 건립 준비위원회 추진계획 회의 개최
     (위령비 건립 추진일정 및 비문 결정)
    2005년 11월 25일 위령비 건립 및 위령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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