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체 없이 제주로 가야 상주를 보게 된다. 천만 다행으로 다음날 아침 제주 가는 배가 있어서 닷새만에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참아가며 최부는 먼저 준비해온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상복은 년 동안 입어야할 옷이다.

누구나가 예외 없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현직에서 물러나 시묘사리를 해야 한다. 그것이 당시의 법도였다.

시묘(侍墓)사리는 고인의 묘 옆에 초막을 치고 삼 년 내내 묘를 지키며 조석으로 상을 올리는 것을 과제로 정성을 다한 생활을 해야 한다.

최부로서는 당장 아버지의 장례가 문제였다. 시가 급하게 고향집 나주로 가는 것이 화급을 다툰다. 연로하신 노모 혼자서 장례를 치를 일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다.

오늘날에는 부모(父母)가 돌아가시면 일주 간 휴가를 받아 초상을 치르면 되지만 유교사회의 당시에는 반드시 시묘사리를 해야 했으며 엄한 계율처럼 지켜야만 했다.

일종의 자기반성의 공백기간이자 부모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왔던 길을 뒤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시묘(侍墓)사리기간 중에는 몸을 정갈하게 닦고 지키며 정성을 다해야 한다. 부인과 동침을 해서도 안 되며 고기 음식이나 가무(歌舞)를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이 기간 중에 아이를 낳더라도 호적에 올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의 집 아이처럼 사생아 취급을 해버렸다.

시묘사리는 삼 년 동안을 계율처럼 지켜야 한다. 벼슬에 있는 자는 3년 동안 자동적으로 휴직처리 되며 지극 정성으로 부모의 묘를 지키는 것이 당시 사대부들의 기본적인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최부는 서둘러서 하던 일을 멈추고 뒷정리를 해야 했다. 매사가 치밀하고 뒤끝을 개운하게 일해 왔던 최부로서는 마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해야 했다. 함께 일해 왔던 정보와 김중을 불렀다.

"이제 정리하자. 자네들은 서리를 보면서 문서정리를 야무지게 정리해주기 바라네."
"예 염려 마십시오. 해오던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두 명의 서리들은 어제까지 일을 하다둔 어승감(御乘監) 목장으로 다시 갔다. 한라산의 중턱에 자리한 목장은 임금이 타아야 할 말을 키우는 특별한 목장이다.

해마다 말을 키워 그중 가장 좋은 말을 골라 3년마다 열 필을 한양으로 헌상해 왔던 곳이다.

터가 넓고 풀밭이 좋아 육지에서 몰래 도망쳐 온 범죄꾼들이 숨어들기에 좋은 곳이다. 그들의 명단을 만들어 깔끔하게 마무리지었다. 20여 마리의 말 중에서 한양으로 올려 보낼 준마도 표시를 해두었다.

관선 대신 수정사 주지의 배를 타고

최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경차관이 초상을 당했다는 소문이 제주 섬 안 여기저기 사방으로 퍼졌다. 풀을 뜯고 있던 말들도 초상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숙인 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슬픈 듯 기다란 목을 빼내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노비문서도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별해서 다시 만들었다. 공노는 공천(公賤), 사노는 사천(私賤)으로 목록부터 새롭게 만들고 끝에 합했다. 실제와 오차 없이 바르게 정리한 것이다.

도망쳐 온자와 거짓 문적을 가지고 있는 자들도 단속했다. 책으로 묶은 다음 전주 부(府)에서 가져온 책과 제주, 대정, 정의현을 대조했더니 가감착오 없이 반듯하게 일치했다.

제주 목에서 해마다 올리는 장적 17책과 제주 3읍의 장부인 호적과 군적 등 모든 문서를 봉해서 목사에게 보냈다. 최부는 모든 장부의 인계를 오늘에야 끝낸 샘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사흘 간의 노력으로 마무리지었다.

찬 겨울에 진눈개비와 비가 비벼져 귀찮게 내리는 윤 정월 초하루, 제주목사는 이른 아침 조문을 왔다. 저녁에도 찾아와 경차관과 함께 탔던 판옥선 이야기를 하며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경차관!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근무를 시작했는데 떠나게 되어 섭섭하오. 너무 상심말고 노모님을 위로해 드리시오. 모든 서류의 정리와 서리는 매듭을 지었으니 걱정하지 마시구려."

저녁에도 목사는 조문을 왔다. 목사는 근심 어린 말로 최부에게 말했다.
 
"경차관! 시가 급하게 나주로 가야 할 것인데 배편을 내가 마련해 줄 테니 그리 아시오."
"급하게 쓸만한 관선이 없소. 그 대신 관선(官船)보다 더 튼튼하고 좋은 배가 수정사(水精寺)의 주지스님이신 지자(智慈)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배가 빠르고 단단해서 어떤 관선도 이를 따르지 못할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이 배려해 준다는 배를 타도록 하겠습니다."

제주목사와 최부 사이에는 묘한 인연이 있었다. 뭍에서 제주에 들어올 때도 같은 배를 타고 왔는데 나갈 때는 그가 마련해준 배를 타고 나가다니 참으로 질긴 인연의 관계라 하겠다. 수정사는 한라산 아래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오늘날의 제주시 외도동 일대다. 지금은 절은 사라지고 무성한 잡초만 일주문대신 서있는 돌기둥이 이곳이 사찰 터였음을 말해준다. 수정사가 언제 지어졌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17세기 초반에서 18세기 초에 폐사되었다고 보여 지는 역사 속에서 번쩍이다 사라진 절이다.

제주도의 비보사찰로 만들어진 절에서는 태풍을 이길 수 있는 배가 있어야 했고, 주지 스님은 당연히 배를 갖고 있어야만 포교활동을 자유스럽게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에서 바다는 생업의 터전으로 바다와 함께 싸워 이겨야하며 물이 무섭다고 이를 멀리 할 수 없는 것이다.

배를 타고 바다를 다스리고 이겨야 포교도 하며 절도 살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