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땅 끝 해남의 관두량에서 출발한 배로 단 이틀만에 조천관에 도착한 최부는 조천 포구의 적막감이 감도는 선창가를 지나 소산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나라님 곁으로 돌아가지?'
 
포구안쪽 언저리에 줄을 맞춰 묶여있는 작은 어선들이 잔잔한 바다 물결 위에 떠있다. 방파제의 끝에는 듬직한 돌이 수문장처럼 서 있어서 포구의 문지기를 자처한다. 외로움에 지친 갈매기 떼가 줄지어 날아가며 슬프게 울어댄다.
 
"끼륵 끼륵…."

마을마다 정자를 짓고 동네의 사랑방역할을 했던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연북정(戀北亭)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쉬기도 했다.

조천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연북정이 자리한 것이다. 연북은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이 담긴 말로, 유배사리를 하던 이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살아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이름에 담겼다.

연북정은 조천성 위에 남동 향을 하고 있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한껏 멋을 부렸다.

조금은 낮은 기둥으로 키가 낮다. 제주의 매서운 정월바람을 견디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키를 낮추고 움츠려야 모진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연북정이 있는 조천 포구는 별도포와 함께 관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으로 현관이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거친 바람이 잔잔해지고 바다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스리기도 했던 곳이다.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향한 끝없는 그리움!
 
제주의 북쪽은 한양을 뜻한다. 단순한 방향의 북(北)이 아니라 죽도록 사모한 임금을 의미한 것이다. 조천관의 다른 이름이 연북정(제주도 유형문화재 3호)이지만 정자뒤쪽으로 길쭉한 타원형의 성곽이 쌓여있어서 망루대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구조가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 방법이 모두 제주민가 형으로 지었다. 물매를 유난히 낮게 지었다.

섬지방의 날카로운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다. 멀리서 볼 때는 작고 낮아 보이지만 듬직한 기둥이 튼튼하고 우람하다.

네모꼴로 쌓아 올린 축대 위에 바다 쪽을 향해 서있다. 네모진 기둥마다 주초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올려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도리를 밭쳤다.

사괘 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점이 건물 전체를 우아하고 훨씬 근사하게 보여준다.

정자의 바닥은 칸칸마다 송판으로 매끄럽게 깔았다. 우물마루로 사방이 터진 정자가 누구나가 한번쯤은 올라서고 싶게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 무기고와 창고, 당(堂)이 있어서 더더욱 권위가 돋보인다. 낮은 물매의 가지런한 지붕과 단청도 없는 간결하고 소박한 건물이 마음을 비운 단아한 조선선비를 닮았다고 하겠다.

상복을 가져온 막금이

최부를 뒤따르던 사람들의 다문 입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두고 온 고향의 식구들을 생각하면 답답한 가슴이 미어질 뿐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리라는 믿음이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낯선 땅 제주에서의 근무는 이렇게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주에서의 섬 생활도 이젠 제법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두 달쯤 지나자 지리도 익숙해지고 이곳 사람들과 서로 통성명하며 알아가고 정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최부를 따라 함께 온 이들이 한결같이 열성적으로 그를 도우며 일한 것이 고마웠다.

별도로 할 일이 없을 뿐더러 오라는 곳도 특별히 갈 곳도 없는지라 오직 경차관의 일을 돕는 데만 열성적이기 때문이다.

해가 바뀌고 새해가 되자 주로 요리를 담당했던 만산(萬山)의 부엌일 솜씨가 몰라보게 발전한 것이었다. 섬에서 나는 다양한 해산물이 그를 일류호텔 요리사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여보게 만산!" 
"예, 부르셨습니까? 경차관님"
"날로 좋아지는 요리솜씨가 놀랍군. 식당이라도 하나 열어야겠네."
"웬 말씀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뭍에서 같이 왔던 그들은 가족처럼 상호의지하고 서로 돌보며 생활해갔던 것이다. 그 날도 저녁을 마치고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며 앉아 있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마당이 북적이며 시끄러웠다.

숨을 헐떡이며 급히 들어오는 자가 있었던 것이다. 벌떡 일어선 최부가 문을 열었다.
 
"누-누 누구냐?"
"접니다. 막금(莫金)입니다."
"뭐라고? 나주집의 막금이란 말이냐?"

나주성안에 살고 있는 부모 집안의 종으로 믿음이 두터웠던 그의 이름이 막금인데 그가 여기까지 왔다니 반갑기도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황당하고 어리둥절했다.

고향집의 허드레 일을 해온 막금이는 소리만 들어도 음성이 커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그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서러움이 가득한 표정에는 손가락만 갖다대도 울음보가 터질듯하다. 방에 들어온 그는 경차관 앞에 작은 보따리를 하나 놓았다.
 
"그것이 무엇이냐?"
"상복(喪服)입니다."
"상복이라니? 누가 죽었단 말이냐? 혹시 노환의 아버지가?"
"예,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입으실 상복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소란하던 방안이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지며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터졌다. 막금이는 최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상주되는 경차관이 입을 상복을 싸들고 관두량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