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2015년 5월 13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러시아와 만나는 날이다. 인천공항 10시 도착을 위해 아침 5시에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는 지금 한국의 봄 날씨와 비슷'하다 했겠다. 비행기가 12시 50분에 모스크바를 향하여 날개를 폈다. 한국과 러시아의 시차는 5시간. 탑승하는 전체 9시간에서 5시간을 빼면 오후 5시 20분에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할 것이다. 기류는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몇 차례 기체가 오르내렸다.

모스크바 공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현지 버스에 오른 우리는 인솔자 유진숙씨를 합하여 총 23명, 모스크바에서 현지 가이더 하순주씨가 인사를 했다. 하순주씨는 모스크바에서 연극영화 전공 박사과정중인 유학생이었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모스크바의 5월은 연두 피는 초봄

식당과 숙소로 가는 길이 심한 교통체증을 보였다. 요 근년에 자동차가 많아져 주말(러시아도 주5일 근무)이면 체증현상이 이처럼 심해진다고 했다. 이를 두고 '주말의 모스크바는 관광객이 지킨다'나. 이 나라 GNP는 200불이고 모스크바는 400불이라고 했다. 부자와 빈자로 양극화된 러시아는 중상층이 없다. 계절은 10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7개월의 긴 겨울을 거쳐 봄 여름 가을이 마치 목이 짧은 미녀처럼 소리 소문도 없이 지나가는 모양이다.

 모스크바의 5월은 새싹이 움을 틔우는 초봄이었다. 해는 점점 길어져 밤 11시에도 한국의 3-4시처럼 해가 중천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백야라 할 수 없다 한다. 새벽 3-4시가 되어도 대낮같은 6-7월이 백야라면 1-2월은 낮 시간이 토끼꼬리 같은 흑주黑晝로 바뀐다.

가이더의 설명이 이어지는 시간에 나는 잠시 감격의 땅 러시아를 떠올렸다. 닫혀있던 시절, 러시아는 거대한 공포와 의문의 땅이었다. 지금 기억에도 생생한 1990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30억 달러라는 개발 차관을 치르고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고르바초프와 만나면서 상황이 여기까지 급진전된 것이다. 그때 우리는 뒷돈 댄 것은 모르고 우리의 정상이 고르비와 과연 어깨를 겨룰 수 있을까를 반신반의했었다. 이제는 러시아를 제집 드나들듯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때 빌려준 돈이 헛 구멍에 돈다발 풀어놓은 것 보다는 백번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더는 러시아에 체재하는 동안은 한시도 소매치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했다. 특히나 동양 사람만을 골라서 괴롭히는 '스키네드'라 불리는 애들은 '위험한 아이들'이라는 별명처럼 연령대가 16-19세인데 못된 만행도 서슴지 않는다나. 이들은 스탈린 숭배주의자이며 머리를 깎고 지하철 등의 공공장소에 출몰하고 어디서든 범행을 자행한다. '스키네드'는 한 마디로 '마피아'이며 러시아의 정치경제는 '마피아'에 이어져 있다 한다. 스키네드는 돈을 만들어 일부는 국가에 헌납하고 국가는 그 대가로 이들을 내놓고 보호한다고도 했다.

시가지에 들어서자 깨끗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물었더니 하루 3차례쯤은 살수차로 청소를 한단다. 정말이지 떨어진 밥알을 주워 먹어도 될 만큼 길거리가 깨끗했다.

러시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침상이 비좁고 불편했다. 신체는 크고 땅덩어리도 넓은 자들이 어머니의 좁은 자궁 안을 생각했는지 몸길이보다 턱없이 짧은 침대가 이들의 문화양식이었다. 베개도 쿠숀을 겸한 목받이 정도였다. 러시아인들은 몸만 대충 걸치고 자는 '새우잠'에 익숙하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도 180Cm가 넘는 거구였는데 그 불편한 침대에서 걸치고 잠을 자며 거작을 창작한 일로 유명하다.

가이더는 동양박물관으로 향하면서 몇 가지의 간단한 러시아어를 학습시켜 주었다. 즈드라스트브이째(안녕하십니까?), 스빠씨바(감사합니다), 브리비엣(안녕), 투알옛(화장실), 빠저아스타(천만예요), 니엣(아니오), 하라쇼(좋습니다) 등등. 일흔이 넘은 어른들이 초등학생처럼 남의 나라 말을 연습하는 모습이 그리도 천진할 수가 없다.

푸쉬킨 도서관 앞을 지나는데 얼핏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러시아 19세기의 사실주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앉아 있었다. 더 가까워지자 웅크린 자세의 고통스런 표정이었다. 생전의 도스토예프스키는 간질병 환자였고 심한 가슴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한다. 그러면서도〈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에서 빈곤과 자유의 문제를 개성 있게 그려낸 엄청난 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