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 시인(화가)

봄볕은 아직 이른가. 양지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의 공작과 마주하고 있다. 부채 살처럼 날개를 활짝 펴든 한 그루의 고혹적인 나무가 보름달 같은 모습으로 보란 듯이 서 있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공작은 하느님의 애첩 같은 참 반할만한 모습으로 서 있다. 뇌쇄적인 저 하늘의 새의 고삐를 누가 끌고 지상에 내려왔을까. W.블레이크가 신의 영광이라 표현했던 공작의 모습은 바로 저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공작의 자기 연출은 바라볼수록 대단하다. 공작의 저쯤의 자기 과시는 한편에선 시가 되고 한편에선 절대 권력을 좌우지하는 채찍이 될 수도 있겠다. 아니 사해를 덮고도 남을 만한 사상이 되겠다. 어찌 저리 거만하지 않고 어찌 저만한 자기과시 없이 어찌 공작의 오늘의 영광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공작의 저 같은 자기과시와 오만 앞에서 인간들은 별의별 표현으로 질투를 한다. 그러기에  『행복의 정복』에서 말한 러셀처럼 공작이 다른 공작을 부러워하지 않는 건 저마다 자기의 꼬리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꽁지라 생각한 때문일까.

그렇기는 해도 러셀의 이 같은 언급은 조금 젠 체하는 자기엄살이 읽힌다. 공작을 살피는 러셀의 눈이 안맹이 아니었다면 기껏 공작을 꼬리쯤에 매달려서 전체를 말할 수 있었을까. 러셀의 언급은 자신의 오지랖이 좀 비좁고 옹졸하다는 사실을 암시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다.

신화에 보면 하늘의 여왕 헤라가 가장 좋아한 새가 공작이다. 남편 제우스가 처녀 제관 이오와 열렬사랑에 빠진 일로 헤라와 한 바탕 사랑의 해프닝을 벌이게 된다. 그 때문에 헤라는 불쌍하게 희생당한 아르고스의 눈알을 공작의 꽁지마다 아름답게 붙여준다. 만약에 공작에게 눈알 무늬의 꽁지가 없었다면 신화에서 보여준 그리스인들의 상상의 폭은 많이 비좁았으리라. 러셀이건 그리스인이건 공작은 꼬리 하나로도 인간에게 종횡무진한 상상력을 헤엄치게 한 아름다움과 위의(威儀)의 새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러셀이나 그리스인처럼 비좁은 상상력에다 내가 여분의 말을 보탤 차례가 되었다. 나는 평소 글과 그림은 쓴다는 사실과 그린다는 사실만 빼고는 모두를 다르게 하는 것을 좌우명 삼는 사람이다. 실에 있어서 쓴다는 것과 그린다는 사실 자체를 바꾸어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쓰지 않거나 그리지 않으면 아예 글도 없고 그림도 존재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파천황적인 새로움과 특이함을 건축해야 한다는 게 시 창작이나 그림에 대한 내 작업상의 신념이다.

저 오만한 공작 앞에서 내 미감을 어찌 보여줄까로 며칠을 고민했다. 생각은 천 갈래 만 갈래. 계절에 맞게 무엇인가를 형상하는 일이 먼저였다. 공작은 이 세월에 여러 화가들에 의해 여러 모습으로 형용되었을 것이다. 정말 ‘그리는 일’만 빼고는 새롭게 표현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그 고집스런 생각에 비추어 저 공작을 어찌 그려내야 할지.

생각 끝에 〈초록 공작〉이라 제목을 잡았다. 한 그루의 나무가 상상 중에 떠올랐다. 그래, 공작나무 한 그루. 좋지! 다가올 계절은 공작나무가 숨 가쁘게 우거질 것이다. 붉은 줄기인 몸통만 빼고는 거만하게 가지를 펼쳐낸 한 그루의 왕비 같은 나무가 태어났다. 공작은 이내 환희의 중심이 되었다.